한문학

면학(勉學)의 서(書)

경전선 2014. 5. 24. 13:19

예전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양주동 박사의 명 문장이다. 어려운 한자어가 섞여 있어서 단어의 의미와 문맥에 대하여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옮겨 온 글이다.

 

면학(勉學)의 서().

양주동(梁柱東)

 

독서의 즐거움 !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東西) 전배(前輩)들의 무수한 언급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孟子)의 인생삼락(人生三樂)에 모름지기 독서(讀書), 면학(勉學)’의 제 4일락(第四一樂)을 추가할 것이다. 진부(陳腐)한 인문(引文)이나 만인(萬人) 주지(周知)의 평범(平凡)한 일화(逸話)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端的)으로 나의 실감(實感) 하나를 피력(披瀝)하기로 하자.

 

열살 전후 때에 논어(論語)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好)?”

운운(云云)이 대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孔子)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失望)은 그 밑의 정자(程子)인가의 약간 현학적(衒學的)인 주석(註釋)에 의하여 다소 그 도()를 완화(緩和)하였으나 논어의 허두(虛頭)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印象)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30,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成就)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의 진리(眞理)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程氏)의 주()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當初) 소박(素朴)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現世)와 같은 명리(名利)와 허화(虛華)의 와중(渦中)을 될 수 있는 한 초탈(超脫)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求道)에 고요히 침잠(沈潛)하는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백년(浮生百年),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亂後) 수복(收復)의 구차(苟且)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안두(三尺案頭)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一穗)의 청등(靑燈)이 희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日前) 어느 문생(門生)이 내 저서(著書)에 제자(題字)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實感)으로 서증(書贈)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이다. 세상에는 실제적 목적을 가진., 실리 실득을 위한 독서를 주장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의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함이다. 선천적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한이야 그야말로 다생의 숙인으로 다복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않은 행복한 족속이다.

 

독서의 즉거움은 현실파에게나 이상가에게나, 다 공통히 발견의 비쁨에 있다. 콜룸부스적인 새로운 사실과 지식의 영역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식의 워즈워드적인 영감, 경건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의 작품에서 나버렸던 자아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에서 발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주지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하였다.

 

그 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의 감시자가

시계안에 한 새 유성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을 응시하고 -- 모든 그의 부하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 --

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定評)있는 고전(古典)을 읽으라, 가장 새로운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한 신서(新書)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에게는 각양(各樣)의 견해(見解)와 각자(各自)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前者)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後者)는 말한다

생동(生動)하는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필요도 없다. 지식인(知識人)으로서 동서(東西)의 대표적 고전은 필경(畢竟) 섭렵(涉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文化人)으로서 초현대적(超現代的)인 교양(敎養)에 일보(一步)라도 낙오(落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比率) 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一律)로 규정(規定)할 것은 못된다. 누구는 고칠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對象)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이 후자의 지론(持論)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弱點)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개어 냄에 있다면, 필경(畢竟) ‘()’()’을 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平凡)하나마 박이정(博而精)’ 석 자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 -- 아니, 우리는 양자(兩者)의 개념(槪念)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다. 송인(宋人)의 다음 시구는 면학(勉學)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境界)이다.

 

벌판 다한 곳이 청산인데 (平蕪盡處是靑山)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行人更在靑山外)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終始) 역설(力說)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汪洋)한 심충(深衷)의 바다에 도달(到達)하기 전에, 우선 기구(崎嶇), 간난(艱難), 칠전팔도(七顚八倒)의 괴로움의 협곡(峽谷)을 수없이 경과(經過)함을 요함이 무론(毋論)이다. 깊디 깊은 진리의 탐구(探究)나 구도적(求道的)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尋常)한 학습(學習)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倍加)된다. 비근(卑近)한 일례(一例),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書籍)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初步的)인 애로(隘路)는 적으니, 학생제군(學生諸君)은 나의 소년시절(少年時節)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漢籍)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어다가 철야(徹夜) 종일(終日) 베겨서 읽었고, 한문(漢文)은 워낙 무사독학(無師獨學), 수학(數學)조차도 혼자서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硏眞)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率直)히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일편(笑話一片) -- 내가 12,3세 때이니, 거금(距今) 50년 전 일이다. 영어(英語)를 독학(獨學)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日課)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new heaven and earth)’ 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獨學書) 문법 설명의 삼인칭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項目)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으나,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안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邑內)에 들어가 보통학교(普通學校) 교장(校長)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이 젊은 신임교원(新任敎員)에게 그 말뜻을 설명(說明) 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날, 왕복(往復) 60리의 피곤함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馬渤)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