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과 보성
이른 점심을 먹고 몇자 적어 본다.
폰을 만지작 거리다보니 한말의 선비 寧齋 李建昌(영재 이건창, 1852~1898)의 생애에 있어서 인터넷 자료가 잘못되는 것 같다. 이건창은 우리 고향 보성에 유배를 왔었기 때문에 내 고향 지식인들이 그와 인연을 짓기도 했다.
보성이 자랑하는 서예가 설주 송운회 선생(1874년생)도 스무살 때 영재 이건창의 제자가 되었다. 나의 竹圃 형님 말씀에 의하면 설주선생은 원래 초명이 震會(진회)였는데, 영재가 雲會(운회)라고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궁금증은 영재 이건창이 보성에 와서 얼마동안 유배생활을 했을까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니 고종은 이건창을 1893년 8월 23일에 보성에 유배를 명했고, 1894년 7월 19일에는 공조참판으로 임명했다. 그러니 약1년 정도이다.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사이트에서 영재 이건창은 1891년에 보성에 유배를 왔다가 그 이듬해 해배되어 1893년에는 함흥지방에 민란에 안핵사를 나갔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잘못된 정보인 것 같다.
무슨무슨 백과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이후 인용자들이 자꾸 이런 오정보를 배껴 쓰면서 확산되었는 모양이다.
(按覈使(안핵사) :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 직책)
한편 구례출신 매천 황현은 1878년(당24세)에 서울에 처음 올라가 머무르는 동안 김택영, 이건창등과 교류하였다고 한다. 그런 인연이 있었는데, 후일 이건창이 보성에 유배를 받아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복차림으로 구례에서 보성에 와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매천 황현은 1892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영재가 보성에 오던 해 1893년 7월에 모친상을 당했다고 하니 이건창이 보성에 온 시기는 실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함흥지방에 민란이 나서 안핵사로 명을 내린 날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보성에 오기 전인 1892년 3월 10일자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믿지 않을 수는 없지 않는가.
참고로 보성에서 멀지 않는 능주(능성)에 정암 조광조가 유배왔다가 사약을 받았는데, 실록을 검색해 보니 1519년(중종14년) 11월16일자에 사사는 면하고 멀리 안치하라는 명을 했고, 한달 뒤인 12월16일자에 사사하라고 되어 있다. 이때 정암은 나이 서른 여덟이었다.
서울에서 능주까지 거리도 멀다만, 옛날에 유배지 도착도 않했는데 사약이 내려갔다는 말을 들었다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것도 진즉 찾아봤는데 자꾸 잊어 먹는다. 이제 내가 그런 나이가 되었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날 때 기록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