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주화(主和)와 척화(斥和)

경전선 2010. 4. 13. 23:05

 

최명길(崔鳴吉)과 김상헌(金尙憲)  (-주화(主和)와 척화(斥和)-)


이 성 무(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Ⅰ. 정묘호란과 최명길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일본·명이 싸우는 동안 만주지방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갔다. 여진족은 본래 건주(建州)·해서(海西)·야인(野人) 여진으로 나눠어져 있었는데 건주좌위의 누루하치(奴兒哈赤: 1559-1626)가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웠다.

명은 약해지고 후금은 강해지는 동아시아 정국에서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 양다리 외교를 해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23년(광해군 15)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인조정부는 친명배금 정책을 쓰게 되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이 광해군의 양다리 외교를 응징한 것이다.

누루하치는 1625년(인조 3)에 수도를 요양(療陽)에서 심양(瀋陽)으로 옮기고 요서지방으로 진격해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 원숭환(遠崇煥)에게 반격을 받아죽고, 그의 여덟 째 아들 황태극(皇太極)이 즉위하니 이가 곧 청 태종이다.

누루하치는 조선에 불만이 있으면서도 되도록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 만이 아니라 여러 후금의 장수[貝勒]들이 명나라를 주공격목표로 하고 조선·몽고는 추후에 도모하고자 했다. 명이 무너지면 나머지 둘은 저절로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후금이 명을 치러 갈 때 배후에서 공격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반해 황태극(홍타아지)은 조선을 먼저 정벌해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형제의 맹약을 맺어 명을 칠 때 중립을 지키도록 하고자 했다. 이러한 때에 이괄의 도당인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橍)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왔다. 그들은 모문룡(毛文龍)의 군사는 오합지졸이고, 인조는 즉위 이래 인심을 잃었으며, 강홍립(姜弘立)등 후금에 항복한 사람의 자손들을 다 죽였다고 허풍을 떨었다. 그러니 지금 쳐들어가서 화의의 글을 보낸 다음 항복하라고 하면 항복할 것이라고 꾀었다.

이에 1627년(인조 5) 정월 8일 패륵(貝勒) 아민(阿敏)에게 36,000명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은 13일 의주를 함락하고, 일부의 병력은 철산의 모문룡을 공격해 그를 신미도(身彌島)로 달아나게 했다. 그리고 주력 30,000은 20일 청천강을 건너 안주성에 도착했다.

조선에서는 병조판서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이경필(李景弼)을 종사관으로 삼아 평안도로 가게하고, 구성(龜城)에 주둔하고 있는 평안병사 남이흥에게 3,000군을 데리고 안주성으로 가서 적을 막도록 했다. 그러나 남이흥은 전란을 대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신들의 사찰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북인 출신인 데다가 이괄난을 진압해 국민의 신망이 높았기 때문이다. 인조정부는 인기가 없었고 성공한 무관이 마음만 잘못 먹으면 정변이 일어날 수도 있어서였을 것이다. 구성은 성도 없는 곳이 어서 장만과 남이흥은 안주에 군을 주둔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서울에 있는 이귀가 구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조가 그 편을 들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변경방어에 밝은 유능한 군 지휘관인 남이흥이 안주전투에서 죽었다. 이 때 가까이 있는 평안감사 윤훤(尹暄)은 당파가 다르다고 구원하지 않았다.

17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조정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가 다투었다. 인조는 그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왔다 갔다하고 있었다. 후금군이 평양에 이르러 화의하자고 했고, 최명길은 적의 기세가 강하니 화의를 받아들이자고 했다. 그러나 대간은 그가 국정을 마음대로 한다고 공격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갔다. 정권이 안정되지 못한 조선으로서는 후금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금도 조선을 다독여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모문룡을 매개로 한인들이 조선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을 자신들의 형제국으로 묶어둠으로써 장차 명나라를 칠 때 뒤를 돌아보아야 하는 염려(後顧之儢)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래서 정묘화약(丁卯和約)은 체결되었다. 그러나 명에 대한 사대는 양해받았다. 이것이 조선이 강화에 응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정묘호란 후 양국사이에는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후금은 점점 강해지고, 명은 동림당(東林黨)과 절당(浙黨)·엄당(奄黨) 사이에 정쟁이 계속되어 급속히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에 후금은 1631년(인조 9)에 대능하성(大陵河城)을 함락하는 등 연전연승했다.

1633년(인조 11)에는 모문룡의 부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산동(山東) 수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했다. 이 때 조선은 후금이 수군을 지원해 달라는 것을 거절했다.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 두려워서였다. 이것이 뒤에 병자호란의 트집이 되기도 했다.

후금은 이미 1631(인조 9)년에 최신 화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자체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후금은 수전능력을 배가시킬 수 있었고, 강화도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다.



Ⅱ. 병자호란과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결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문제가 많이 생겼다. 세폐증액 문제, 개시(開市)문제, 조선인 월경(越境) 채삼(採蔘)문제, 가도(椵島)에 대한 급량(給糧)문제, 후금인 도망자 송환 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1634년(인조 12)에 후금이 몽고족의 차르를 공격해 원의 국쇄(國璽)를 얻었다. 그리하여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태극(홍타아지)을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 여기에는 조선이 꼭 동조해 주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마부대가 몽골 출신 패륵 49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와서 동의를 받아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마부대는 겨우 목숨을 부지해 달아났다.

조선의 조야가 흥분했다. 몽고 패륵들을 명나라를 배신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왕이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최명길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를 자칭하더라도 형제관계만 유지되면 괜찮다는 것이다. 이미 고비사막 넘어까지 정복했으니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청이 보낸 사신도 사안별로 수용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용골대·마부대가 성과 없이 돌아가자 전쟁의 기운이 돌았다. 나덕헌(羅德憲)은 청에 가 있었으면서도 끝까지 추대식에 참석하지 않고 국서만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도 조선에서는 나덕헌이 국서를 들고 왔다고 죽여야 한다고 했다. 청은 조선이 강화도만 믿고 서생들의 농간에 놀아나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조선은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쳐들어 왔다가 스스로 무너진 전철을 밟지 말라고 충고했다.

2월 용골대 일행이 도주하고 아무런 소식이 없자 최명길은 역관을 보내 청의 동태를 살피자고 했다. 물론 언관들이 반대했다. 이 때 명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왔다. 그는 조선과 청을 격동시켜 싸움을 붙이고자 했다. 전마를 공급해 달라고도 했다. 그러나 후금과 끊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가도의 도독 심세궤(沈世餽)도 비슷한 충고를 했다. 그나마 청의 서진을 억제하던 조선마저 무너지면 명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명길은 다시 정묘화약에서와 같은 형제관계만 유지된다면 칭제건원(稱帝建元) 여부는 따질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공연히 역량을 돌보지 않고 큰소리를 일삼는 것은 견양(犬羊)의 노여움을 촉발해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트리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9월 척화·주화 논쟁은 최고조에 달했다. 최명길을 비롯해 영의정 김류, 우의정, 이홍주(李弘冑), 사간 정태화(鄭太和)등이 통역을 보내 적정을 살피자고 했다. 정묘화약을 어긴 것을 조선에 전가해서는 안 되며, 용골대 일행이 곤혹을 치룬 것에 대한 사과도 하게 했다. 척화파들은 존명사대가 국시(國是)라면서 최명길이 역관 박인범(朴仁範)을 청에 보내는 것은 광해조 때 하서국(河瑞國)을 보내 후금을 달래려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비난했다.

최명길의 목표는 분명하다. 명에 대한 의리도 중요하지만 우선 자국의 종묘사직과 생령을 먼저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명(爲明)도 중요하지만 존국(存國)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반정의 대상이기는 했으나 광해군의 외교정책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 명나라보다 자국의 이해를 더 중시하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외교정책이다. 최명길은 정묘년 화약을 지키는 선에서 노력하다가 안 될 경우는 압록강변에서 적을 막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화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은 반대파인 정온(鄭蘊)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반정공신들이 멀쩡한 관군을 사병처럼 자기들의 안위를 지키는 데만 쓰는 것과 생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의 안전만 신경을 쓰는 태도를 비판했다.

척화론의 기승을 부려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이 터졌다. 최명길은 정묘호란 후 10년동안 지탱해 온 것은 화의의 덕이라고 했으나 시독관 조빈(趙斌+貝)은 정묘호란 이후 자강(自强)하지 못한 것은 화의 때문이라고 했다. 최명길은 후금의 군주를 “청국한”(淸國汗)이라 불러야 하고, 후금의 사신을 불러들여 만나보아야 하며, 만약 박대하면 뒤에 후회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 했다.(제1차 병자봉사)

이에 대해 오달제는 최명길이 왕의 신임만 믿고 삼사의 공론도 무시하고 화의를 주장하니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오달제의 척형(戚兄)인 이기조(李基祚)가 “자네가 최명길을 공격하지만 그가 없어도 국사가 과연 걱정이 없고, 청나라 군대가 과연 다시 처 들어오지 않겠는가? 라고 묻자 오달제가 화를 내며 ”청나라가 쳐들어온다는 것은 조정을 공동(恐動)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젊은 척화론자들이 거의 그와 비슷했다. 척화론이 우세한 것이다. 실리보다 명분이 우세했던 것이다. 인조는 1품 중신을 공격한 죄로 오달제를 파직했다.

부교리 윤집은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盧賊)은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니 우리나라가 살아서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명의 재조번방지은(再造藩邦之恩)을 잊을 수 없으니 화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은인인 명을 위해 척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11월 6일 대간은 최명길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했고, 최명길은 한성판윤을 사임하고자 했다. 11월 15일 최명길은 제3차 병자봉사를 올렸다. 문신 당상을 추신사(秋信使)로 보내 화친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추신사는 파견되었다. 정온은 정묘호란 후 10년 동안 저들과 교전해 본 적이 없으니 강약은 해보아야 알고 승부는 판결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과 연대하면 누가 이길지 모른다는 것이다.

14일 인조가 강화로 가려고 했으나 숭례문에 도달해 청군이 이미 양철평(良鐵坪: 홍제동)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이 이미 막힌 것이다. 최명길이 나섰다. 최명길은 이경직과 편비지득룡(池得龍)만 데리고 청군 진영에 가서 왜 쳐들어 왔나를 따지면서 시간을 지연시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청은 왕의 아우와 대신을 보내라고 해 능봉수(綾峯守)를 왕제로, 판서 심집(沈輯)을 대신으로 위장해 보냈다가 들통이 나 그곳에 가 있던 박난영(朴蘭英)이 처형되었다. 참봉 심광수(沈光洙)는 화의를 주도한 최명길의 목을 베야 한다고 했다.

20일 청이 화친을 요구해 왔다. 인조는 비국낭청 위산보(魏山寶)를 보내 소고기와 술을 선물했으나 황제가 이미 왔으므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최명길은 국서를 썼다. 1) 정묘화약 후 10여년간 우의를 지켜왔다. 2) 명과는 부자관계라 도와 준 것이 없지만 청에 대해서는 화살 하나 쏜 적이 없다. 3) 작년 몇 가지 잘못된 것은 변신(邊臣)과의 교감이 잘못 되어서이니 용서해 주면 화해하겠다. 4) 용서해 주지 않으면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의 역관 정명수(鄭命壽)에게 은 1천양,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은 3천양씩 몰래 주기로 했다.

1월 18일 최명길이 비변사에서 항복문서를 교정하고 있는데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국서를 찢었다. 그의 논리는 이랬다.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치 못할 것이니, 신하들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 되었습니다.“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를 주워서 붙이면서 “국서를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또한 국서를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裂書者 不可無 而補書者亦宜有)라고 하면서 국서를 다시 썼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도량이 편협하고, 기개가 강직해 좋은 곳에 들어가면 천 길 낭떠러지에 서있는 기상이 있다. 그러나 잘못 들어간 곳에서도 뜻을 굽혀 고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식견이 모자라서인 듯하다”고 했다. 이경석(李景奭)이 국서를 교정해 내일 보내면 어떠냐고 했다가 최명길의 질타를 받았다. 조그만 곡절만 따지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대간은 묘당에서 하는 일을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청은 황제가 내일 돌아가니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면 사신을 더 이상 보내지 말라 하고, 국서를 모두 돌려주었다. 그런데 1월26일 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대궐 밖에 몰려와 척화신을 청진으로 보내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인조는 자결도 못하고 척화신 윤집·오달제·홍익한(평양서윤으로 미리 보내 체포됨)을 청진에 보냈다. 인조는 용골대·마부대를 인견하고 시종 50명을 데리고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최명길은 형편이 어려워 앞으로는 명에 사신을 보낼 수 없다고 통보하게 했다.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관료들이 휴가를 청하고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김상헌은 가족 앞에서 목매 자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북문을 거쳐 안동 학가산 아래 은거했다. 최명길은 이조판서로서 그만두려는 사람들을 모두 경질하고, 4월9일에는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반면에 김상헌은 자신을 척화신으로 청진에 보내달라고 했으나 실패하고, 인조가 출성할 때는 길가에 엎드려 통곡하고 다음 해 2월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는 “대가(大駕)가 출성하는 날에 만약 성 밖으로 한 발작이라도 넘어서 면 이것은 거순효역(去順效逆)하는 것이다. 임금이 사직을 위해 죽으면 신하는 따라서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우고, 싸우다 안되면 물러나 자정해야 한다. 이것이 신하의 의리다”라고 했다. 6월 29일 청나라에서 원병 5천 명을 보내라고 했다. 최명길은 스스로 사은사로 가서, 전란 끝이라 백성이 피폐한데다가 우역(牛疫)이 돌아 파병할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우리는 300년 동안 명을 섬겨 명을 치는 군대를 낼 수가 없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징병을 면제받았다. 그 공으로 그는 6월 29일에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반면에 김상헌은 “자고로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반역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들의 세력이 강하니 화를 입는다고 한다. 그러나 명의(名義)는 지중하고, 범하면 역시 재앙을 받는다. 그럴 바에야 바른 것을 지키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낫다. 무릇 순리를 따르면 민심이 즐거워하고, 민심이 즐거워하면 근본이 단단해지니 이것으로서 나라를 지키면 달성하지 못할 것이 없다. 지금 만약 명의를 버리고 은혜를 잊으면 마침내 천하후세의 의론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이니 장차 선왕을 지하에서 어떻게 보겠는가?”라고 했다.

인조는 “김상헌이 평소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자고 해 나도 그렇게 여겼는데, 오늘날에는 먼저 나를 버리고 젊고 무식한 자의 앞장을 섰으니 임금을 속이는 것이 심하다”고 비난했다. 최명길도 “유식한 사람은 다 김상헌이 마음 쓰는 것을 알지만 젊은 사람들 중에는 사모해 본받는 자가 많다. 그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할 때 그 아이들이 옆에 있었다. 이러고도 죽을 수 있는 자가 있겠나? 또한 임금은 범의 굴로 들어가는데 그 신하는 북문으로 나가버렸으니 고금 천하에 이런 도리가 어디 있나?”고 동조했다. 이에 장령 박계영(朴啓榮)등은 “김상헌은 자기의 명절(名節)만 지키고, 군왕의 명절은 생각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빌미로 붕당을 조성하고 있으니 극변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해야 한다”고 탄핵했다.

그러나 1640년(인조 18)청의 용골대가 김상헌이 삼전도비를 파손했다는 헛소문을 듣고 그를 잡아갔다. 왕은 그에게 백금 500양을 주어 위로했다. 갑자기 애국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실지는 승지 신득연(申得淵)이 그를 얽어 넣은 것이다. 1638년(인조 16)7월 14일에 또다시 군사 5천을 징병해 보내라고 했다. 이번에도 영의정인 최명길이 사은사로 갔다. 그래서 두 번 째로 파병을 무마했다. 그러나 1642년(인조 20) 10월 13일에 중 독보(獨步)를 밀파해 명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청국에 소환되었다. 임경업(林慶業)과 짜고 독보를 보내 명과 내통하는가 하면 선천에서 한선(漢船)에게 쌀 200섬을 준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명의 장수 홍승주(洪承疇)가 청에 투항해 밝혀진 것이다. 참판 박황(朴潢)이 최명길에게 임경업한테 뒤집어씌우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최명길은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다. 최명길은 왕은 모르는 일이고 자기가 전적으로 한 일이라 했다. 그렇기는 하나 청에 파병한 이후 명과 원수가 되어 간첩을 보내 명의 정보를 수집한 것에 불과하다고 변명하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한선을 도운 것은 신경진이 한 일이라 했다. 신경진이 청의 통역관 정명수(鄭命壽)와 친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최명길은 사형수 감방인 북관(北館)에(1643년 4월에 남관으로 이감), 대중을 현혹하고 나라를 그르친 김상헌은 남관에 수감되었다. 주화파·척화파의 대표가 다 같이 나라를 위해 청의 감옥에서 만난 것이다. 최명길은 <중용>과 <주역>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1645년(인조 23)에 청이 북경을 함락하자 소현세자 내외를 비롯해서 봉림대군 내외와 최명길·김상헌도 풀려나 귀국 길에 올랐다. 용골대가 서쪽을 향해 황제에게 고맙다고 절하라고 했다. 최명길은 4배를 했으나 김상헌은 최명길이 소매를 끌어도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많은 시를 주고받으면서 화해했다. 최명길은 이해를 구하는 쪽이고, 김상헌은 의리를 고집하는 쪽이었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정말로 춘추의리를 부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내기 위한 것으로 오해했으나 그가 감옥을 갇혀 죽을 자리에서도 의리를 지키는 것을 보고 그 의리 있음을 믿게 되었다고 했다. 반면에 김상헌은 최명길을 진회(秦檜)와 다름없다고 여겼으나 역시 청나라 감옥에서 죽음으로써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애국심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 두 사람의 사후의 평가는 어땠나? 인조를 이은 효종을 북벌론을 국시로 했고, 북벌론은 송시열이 앞장 선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효종의 북벌론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달랐다. 전자는 왕권강화를 위해, 후자는 노론의 정치적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명분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이 송시열의 숭명배청 이데올로기가 바로 김상헌의 척화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 노론이 주도하는 서인 정국에서 김상헌은 높이 평가되고, 최명길은 저평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김상헌은 대로(大老)로 대접을 받고, 그 자손이 19세기에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었는데 반해 최명길은 인조반정의 핵심이었는데도 인조묘정에 배향도 못되고, 그 후손들도 손자대까지는 그런대로 현달했으나 그 이후는 크게 드러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두 사람의 주장을 대비하자면 최명길은 존국(存國)을 위명(爲明)보다 우선했는데 비해 김상헌은 위명을 존국보다 우선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