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과 소동파
(퍼 온 글)
소동파(蘇東坡)와왕안석(王安石)은 서로 정견(政見)이 판이하게 달라 항상 대립하였다. 종종 황제의 면전에서 까지 날카롭게 맞섰다. 왜냐하면 두 사람 의견이 서로 날카롭게 맞서 어느 쪽도 상대를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동파의 정견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맞서 현재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주장이었다. 만약 한 가지 예를 들어 비유한다면 왕안석은 고시제도(考試制度)를 개혁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왕안석은 고시 과목 중 시부(詩賦)와 명경(明經) 과목을 없애고 오로지 경의(經義)와 논(論)과 책시진사(策試進士) 과목 만 남겨두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소동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왕안석의 의견을 무시해 버렸다. 소동파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동파는 왕안석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은 서로 보완하고 도와서 일이 잘 되어 나가도록 협조하였다.
소동파는 천재적인 재능이 넘쳤고 왕안석 역시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다.
신종(神宗)이 나이 20세에 즉위 한 뒤 진취적인 청년 황제로써 부정부패를 타파하려고 했으며 악폐가 일소되어 사회의 풍기가 정화되기를 원했다.
신종은 왕안석에게 개혁의 실권을 일임하였다. 소동파는 왕안석에게 눈에 가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왕안석은 소동파를 호주(湖州 : 현재 浙江省 湖州) 자사(刺史 : 州知事)로 좌천시켜 버렸다.
호주(湖州)는 태호(太湖) 바로 밑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항주(杭州) 북쪽 66km 지점에 있는 도시이다.
소동파는 호주자사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 開封으로 돌아와 왕안석을 배알하였다. 서울로 돌아 온 소동파는 그 당시 승상부(丞相府) 서방(書房)에서 임직명령을 대기하고 있던 때 였다.
어느 날 소동파는 서방(書房)에서 책을 보던 중 우연히 왕안석의 필적(筆蹟)으로 쓰여진 시고(詩稿) 두 구절을 볼수 있었다.
”서풍작야과원림(西風昨夜過園林), 취락황화만금지(吹落黃花滿金地).”
다시 말하면 ”지난 밤 서풍이 화원을 휩쓸어 지나 가더니, 황국화 꽃을 모두 떨어뜨려 땅바닥에 황금을 깔아놓은 듯 하구나!” 란 뜻이다.
여기서 황화(黃花)는 국화꽃을 의미하며 서풍(西風)은 가을 바람을 뜻한다.
소동파는 이상과 같은 왕안석이 친필로 쓴 시구를 읽고 웃음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소동파는 왕안석을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동파는 ”국화는 가을 바람이 불어도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황국화의 꽃이 가을 바람에 의하여 모두 땅에 떨어져 황금을 깔아 놓은 것 같다고 시를 읊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소동파는 즉시 붓을 손에 들고 다음과 같이 두 구절의 시를 써서 왕안석의 시 속에 첨부시켰다.
”추화불비춘화락(秋花不比春花落), 설여시인자세음(說與詩人仔細吟).”
다시 말하면 ”가을에 피는 꽃은 봄에 피는 꽃과 달라서 바람이 불어와도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시인들에게 말하노니 시를 읊을 때 주도면밀하게 주의를 하시오!” 라는 뜻이다.
소동파는 두 구절의 시를 써서 왕안석의 시 속에 끼어 놓았는데 마음이 그렇게 상쾌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동파는 두 구절을 쓴 시 쪽지를 왕안석의 시 속에 살그머니 넣어두고 몰래 달아나 버렸다.
왕안석은 소동파 보다 열 다섯 살 위이다.
왕안석은 소동파의 필체임을 알고 자존심이 매우 상하였으며 기분이 매우 나빴다. 그래서 왕안석은 소동파에게 조정의 관직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왕안석은 ”잠간만 기다려라! 소동파! 너! 황주의 황국화 꽃이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것을 지금은 모르고 있지만 곧 알게될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너를 책망할 수 없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안석은 소동파를 황주(黃州)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임명하였다. 단련(團練)은 북송 때 농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서 존재했던 지주 계급의 지방무장 조직인데 그나마도 단련(團練)의 정사(正使)의 보좌역인 부사(副使)로 임직 받았다.
소동파는 황주(黃州)로 좌천 되어 갔지만 귀양이나 다름 없었다. 황주(黃州)는 현재 호북성(湖北省) 황망현(黃網縣)이며 무한(武漢)의 동쪽 50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소동파는 한적한 시골 황주(黃州)에 머물며 유명한 시사(詩詞)와 서화(書畵) 작품을 남겼다.
왕안석은 소동파를 황주(黃州)로 좌천시켜 내려 보내기 전날 밤 소동파를 면접하였다.
왕안석은 소동파에게 ”한가무사(閑暇無事), 환요독서박학(還要讀書博學).” 이라고 권고했다.
다시 말하면 ”황주(黃州)로 내려 가서 할일 없는 여가를 이용하여 책이나 읽고 학문을 더 넓히시오!” 라는 뜻이다.
소동파는 원래 박학다식하였다. 그러므로 왕안석이 이와 같이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을 듣고 속이 뒤집혀진 소동파는 ”승노태가지교(承老太師指敎)” 라고 왕안석에게 대답했다. 다시 말하면 ”예! 노태사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는 뜻이다.
소동파가 황주(黃州)에 있을 때 중양절(重陽節)이 돌아왔다. 소동파는 정혜원(定惠院) 주지(住持)가 여러 종류의 황국화씨를 보내 준 것을 뒷뜰에 심었었다.
오늘도 또 한 번 뒷뜰에 나아가 황국화꽃을 감상해야지! 하고서 소동파가 뒷뜰에 가보니 국화꽃은 어느새 땅바닥에 떨어져 국화꽃 가지에는 꽃 한송이 없고 뒷뜰에 황금으로 포장해 놓은 듯한 풍경을 보았다.
소동파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뜨고 입을 벌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서풍작야과원림(西風昨夜過園林), 취락황화만금지(吹落黃花滿金地).”
소동파는 왕안석의 국화에 대한 시구를 머릿 속에 떠올리며 과연 세상에는 왕안석이 말한 그러한 국화꽃도 있구나! 하고 다시 한번 탄식하였다.
소동파는 후에 친구를 만나서 ”내가 왕안석의 시집 속에서 나 혼자 생각으로 잘못되었다고 두 구절을 뽑아내어 그의 약점을 파헤친 죄의 대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공(公)적인 일을 가지고 왕안석이 자기의 개인적인 분을 풀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가 왕안석이 옳고 소동파가 틀렸다고 알았겠습니까? 정확한 인식과 명철한 견해를 갖고있는 사람에게도 실수는 있는 법 아닙니까? 성인들도 잘못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들이랴! 그러므로 우리들은 절대로 남을 비웃으면 않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한번 실수로 그만큼 더 현명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 말했다.
소동파는 일생동안 수 많은 일화를 남기고 죽었으며 소동파에 대한 고사는 여러곳에 기재되어 있다.
소동파는 은연중에 왕안석과 불만으로 생긴 감정상의 관계가 있었지만 약간 왕안석을 존중하는 마음도 있었다. 북송(北宋) 신종(神宗)은 소동파가 인재라는 것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원풍(元豊) 7 년(서기 1084 년)에 송신종(宋神宗)은 소동파에 대하여 ”불인종기(不忍終棄)” 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면 ”소동파를 끝까지 버리기를 아까워 했다.” 는 뜻이다.
그래서 신종은 소동파를 황주(黃州)에서 소환하여 현재 개봉에서 서남 쪽 160km에 자리잡고 있는 하남성(河南省) 여주(汝州 : 현재 임여진(臨汝鎭))으로 데려왔다. 그 당시 왕안석이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 난 후 여주(汝州)에 퇴거하여 머물러 있었다.
왕안석은 소동파가 여주(汝州)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귀를 타고 소동파를 마중나가 만났다. 그래서 왕안석과 소동파는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사이좋은 친구로써 지냈다.
소동파는 또 왕안석의 수 많은 시(詩)에 보운(步韻)도 했다. 보운(步韻)이란? 시(詩)를 지을 때 남의 시(詩)에 화합하여 연(聯) 마다 원운(原韻)을 사용함을 일컫는다.
또 소동파는 병들어 있는 왕안석을 보고 시(詩)도 읊었다.
”기착여자(騎着驴子), 고단지유주유원(孤單地愈走愈遠)”
다시 말하면 ”당나귀 타고 다니는 당신! 외롭고 쓸쓸하게 보이며 갈수록 병이 치유되기 어려워 지는 것 같구려!” 라는 뜻이다.
소동파는 왕안석과 대화한 것들 중 왕안석이 소동파에게 전원주택을 사라고 권고한 것을 생각하며 시를 읊었다.
차형왕운사절(次荊王韻四節)에 있는 시(詩)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여묘묘입황파(騎驴渺渺入荒陂), 상견선생미병시(想見先生未病時).
권아시구삼묘택(勸我試求三畒宅), 종공이각십년지(從公已覺十年遲).”
다시 말하면 ”내가 당나귀 타고 그지없이 넓고 아득한 황량한 지방으로 들어 갈 때 나는 당신을 몹시 그리워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건강할 때 였오. 지금 당신이 나에게 500평(坪) 대지에 있는 전원 주택을 마련하라고 권하시는데 10 년이 늦었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오!” 라는 뜻이다.
이 시(詩) 속에 소동파의 깊은 마음이 서려있다.
소동파는 ”10년 전에 만 왕안석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들 우리 둘 사이는 참으로 좋았으련만……!” 하고 아쉬워 했다.
왕안석은 소동파를 만난 후 2년 후인 서기 1086 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