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기10(태산, 대묘, 황하)
그러니까 방중 5일째.... 오늘 일정은 태산 등정과 오후에 대묘, 그리고 황하를 답사하는 일정이다.
우선 전날밤 투숙했던 곡부의 행단호텔은 입구 로비에도 여러 고전구절로 인테리어를 한 호텔이었다. 사진을 한장 찍어 올 것을...
그런데 방에서는 한장 찍었다. 공자님 고을 답게 호텔방에도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엇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구절로 <子曰 爲政以德이 譬如北辰이 居其所어든 而衆星이 共之니라>, 즉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을 비유하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 별들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고 한 구절이다.
아침 일찍 태산에 오른다.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라고 한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으며, 역대 황제들이 하늘의 뜻을 받는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했던 곳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니 산 중턱에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도 많고... 이름하여 天街...
정말 사람들도 많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방향이 몇군데 별도로 있나보다.
석벽에는 온갖 문자들이 적혀 있고... 특히 오른쪽에 금박을 입힌 것은 당현종 글이라던가?(미확인)
벌써 잊어 먹어버렷다. 꼼꼼히 메모해 올것을...
의미있는 장소이니 만큼 한장 찍었다.
맹자 진심편(상)에 보면 孔子 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 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 이라고 했다.
(해석은 이하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퍼온 글을 내가 조금 첨삭해 본다)
공자께서 노(魯)나라 동쪽에 있는 동산(東山) 꼭대기에 올라가셔서는 바로 노나라가 작은 나라인 것을 느끼셨고, 또 태산 꼭대기에 올라가셔서는 바로 천하가 작은 세계라는 것을 느끼셨다. 그러므로 바닷물을 구경한 사람에게 강이나 시냇물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에게는 세속적인 학문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 맹자는 평생 공자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는데,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야 세상을 조감할 수 있듯이 직접 공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의 학문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염원이 담겼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觀水有術,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 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바닷물을 관찰하는 데는 방법이 있다. 반드시 그 움직이는 물결을 보아야 한다. 마치 해와 달을 관찰할 때 그 밝은 빛을 보아야 하는 것과 같다. 해와 달은 그 밝은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그만 틈만 있어도 반드시 비추어 준다. 흐르는 물은 그 성질이 낮은 웅덩이를 먼저 채워 놓지 않고서는 앞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군자도 이와 같이 도에 뜻을 둘 때 아래서부터 수양을 쌓지 않고서는 높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학문과 인격의 도야에 있어서 높은 태산, 넓은 바다나 밝은 태양과 같은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이치에 얽매어 갈팡질팡하다 보면 언제 참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등태소천은 본래 인격을 닦고 학문을 하는 태도를 가리켰는데, 후일 그 뜻이 변하여 높은 데 올라야 큰 것을 볼 수 있다는 말로 쓰이고, 사람은 주어진 위치에 따라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데까지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태산을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점심을 먹었고(두보의 망악 초서작품이 걸려있던 호텔식당), 그리고 나서는 대묘 구경을 햇다. 대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곳이냐고 의문을 갖을 것이다.
그러니까.... 황제가 태산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와서 천지 지신에게 먼저 제사를 지내던 곳이란다. 북경의 태화전, 공묘, 그리고 대묘 이렇게 3대 건축물이라고 했다.
무슨 조형물이라고 햇는데 잊어 먹었다. 아마도 악귀를 물리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여러 글씨 비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건륭제, 강희제에 대한 상식이 좀 있었어야 하는데...나는 잘 이해를 못하겠더라.
강희, 건륭황제는 대단한 명필이었는가 보다.
간략하게 강희-옹정-건륭제 중에서 강희와 건륭만 검색해 보자.
강희제
이름 현엽(玄燁/玄曄). 시호 인황제(仁皇帝). 묘호 성조(聖祖). 연호 강희.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순치제의 유명(遺命)으로 8세 때 즉위하고,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청나라의 지배는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되었으며, 다음의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로 계승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의 유조(遺詔)로 4명의 만주 기인(旗人)이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되어 집정(執政)의 임무를 맡았으나, 1669년부터 실질적인 친정이 되었다.(이하 생략)
건륭제
이름 홍력(弘曆). 시호 순황제(純皇帝). 묘호 고종(高宗).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중략)...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조부 강희제(康熙帝)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공자가 비판 받던 시기에 골재가 금인 줄 알고 도둑들이 뜯어 왔는데, 알고보니 동(구리)이더란다.
그 정자 아래서 잠시 한장 찰칵...
이쯤 되니... 피곤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정이 바쁘다. 다시 제남으로 올라가서 황하를 보러가야 한다.
올라가는 버스가 조용하다. 모두 피곤한가 보다.
주변엔 온통 흙먼지인데,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려 북으로 간다.
나는 혼자서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황하를 보러 간다고 한다.
혹자는 그냥 강물을 뭐하러 보러 가는냐고 할 것이다. 나는 혼자서 登鸛雀樓 시를 음미하면서....
그런데 그날 정말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에 미주알 고주알 다 적을 수는 없고, 어쨌든 그날 우리들은 정말 오래오래 추억거리가 될 경험을 하였다. 혹자는 실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절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그저 호의호식하면서 편하게, 편하게만 지나오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우리 순진한 최가이드 덕분에 황보 어르신께서도 노구를 이끌고 황하를 보게되었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 황하가 의미하는 바는 심히 크다. 이른바 황하문명이 발달된 곳,,,
우리들은 그곳에서 우리들만이 느낄 수 있었던 추억꺼리를 만들었던 것이다.....(그야말로 勿爲醒者傳....이랄까)
사실은 요 아래 사진은 그 전날 제남에서 곡부로 향하던 날 찍어둔 황하사진이다.
이렇게 5일째 일정이 지났다.
피곤한 사람들은 맛사지 하러 나갔고.... 그런데 거기는 그렇게 크게 하는 업소는 없는 모양이다.
그날 밤도 우리 최가이드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 다녀야 했다. 맛자시 업소 섭외하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