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 늙으막에 파업을 맞아 오늘로서 무려 보름이 지나간다.
조합과 사측의 사이에서 난처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고 뭐 뾰쪽한 수도 없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그 뒷 치닥거리에 정력을 허비해야 할련지....
파업기간 중에 시달릴 때면 여기가 일종의 도피처였던가..., 마음은 이곳을 늘 찾고 싶었다.
그러나 명색이 팀내 고참인 사람이 한가하게 노닥거릴 수는 없고.... 이제야 망중한을 찾아본다.
겨울철이면 늘 생각나는 시가 있다.
겨울철 흐린날 오후, 거기다가 눈발이 간혹 날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생각나는 시이다.
특히 3, 4구가 절창이다. (이하 베껴와재편집한 글)
別董大(동대와 헤어지며)
唐, 高適
千里黃雲白日熏 (천리황운백일훈) 천리에 뻗힌 구름, 해는 져가고
北風吹雁雪紛紛 (북풍취안설분분) 북풍 속에 기러기 날고 눈발이 날리네
莫愁前路無知己 (막수전로무지기) 서러워 말게, 앞 길에 벗이 없다고
天下誰人不識君 (천하수인불식군) 천하에 그 누가 그대를 모르리
(훈 : 어둑어둑할 훈)
고적(702~765)은 젊어서는 주로 산동과 하북지방을 유랑하며 지냈고,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야 등용되어(이 부분은 미확인?) 관료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주로 변경을 소재로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는 젊어서 많은 지역을 유랑했던 경험이 그의 시풍을 결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웅건하고 기세가 호방해 잠참(岑參)과 함께 '고잠(高岑)'으로 불리우기 도 한다.
관료가 되기 전에는 무협 세계의 사람들과 폭넓게 교류했고, 관료가 되어서는 황제에게 직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남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백, 두보와도 교류를 하였는데, 이들과 견줄 만한 또다른 시풍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 나오는 董大는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였던 동정란(董庭蘭)을 뜻하며, 칠현금을 잘 탔다고 한다. 동정란을 董大라고 한 것은 그가 형제 중에 맏이 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처량하게 이별을 노래하지 않고 먼길을 떠나는 벗을 박력있게 격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설명은 <차이나패스>라는 카페에 적힌 [당(唐)시로 배우는 중국어] 高適 別董大 (고적 별동대)라는 글을 재편집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