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구 나온 김에 기장지역과 윤선도의 행적에 대하여 정리해 보자. 그는 여기서 4년7개월이나 있었다고 한다.
(내가 다시 검토해 보니 약4년 4~5개월이었던 것 같다)
우선 윤선도의 생애에 대하여(퍼온 글)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 호: 고산(孤山) 조선 중기의 문신. 시조시인,
우리나라 국문학상 시조시인의 1인자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 그는 분명 16새기를 풍미한 문학인이요 우리나라 원림문화의 전통을 형성한 조경인이다. 건축사업에 공을 남긴 실업인이며 민중을 사랑한 정치인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가계를 보면 고산은 해남 윤씨의 16대손 의정부 우참찬을 지낸 윤의중에게 유심. 유기. 유순 세아들이 있었는데 고산은 유심의 세 아들 중 둘째로 1587년 6월 22일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해남 종가에 아들이 없어 입양돼 대를 잇고 있던 작은아버지 유기 역시 아들이 없자 고산은 여덟살 때부터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 연동에서 자랐다.
그의 행장을 보면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바르며 곧은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여 순탄한 일생을 살지는 못했다. 26세가 되어서 진사시험에 합격했지만 당시는 광해군 시절로 어지러운 때 광해군에 아첨하여 권세를 부리는 세도가의 횡포를 보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에 대하여 망군부국하는 죄를 묻는 상소를 올리고 만다.
그 연유로 첫 시련기를 맞게 된다. 서른 한살 되던 해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고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돼 6년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1623년 인조반정.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지만 유배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해남에 돌아와 처절했던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에 젖으면서 인생의 깊이를 느끼는 원숙한 나이로 들어섰다.(이하 생략)
일광 어느 바닷가에 가면 삼성대라는 윤선도 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베껴온 사진이다.
고산선생은 기장에 유배를 왔다가 부친상을 당하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1년뒤(1620년) 제사에는 제문을 짓고 제물을 보내기도 한단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1587-1671)]는 30세 때인 1616년(光海君8) 12월 21일, 성균관 유생(成均館 儒生)으로 권신 이이첨(權臣 李爾瞻)등의 횡포(橫暴)를 상소(上疏)했다가 함경도 경원(咸鏡道 慶源)땅에 유배(流配)된다. 12월 26일에 그를 변방에 유배를 보내야 된다는 상소가 올라간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이듬해(1617년)에 유배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약1년정도지내다가 그 이듬해인 1618년(32세) 겨율에 기장으로 이배되었고, 그리고 1619년 양부 윤유기가 5월에 죽었는데, 그해 11월에 가보지도 못하고 슬퍼하는 제문이 있다.
그 제문의 내용을 보면 휴가를 받아 장례를 치렀다는 어느 유튜브 해설은 잘못된 것 같다. 아무튼 고산선생은 1623년(37세) 인조반정 후 4월에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므로, 기장에는 약4년 4~5개월 지내셨다고 보아진다.
한편 35세 때인 1621년(光海君13) 辛酉 八月二十五日에 이 곳 「三聖臺」에서 유배지를 찾아 온 同生(善養)과 作別하면서 지은 詩로써「贈別少弟」二首가 있고 또한 病中遺懷(병중유회) 一首를 남겼다.
贈別少弟 二首(동생과 헤어지면서 지어준 시 두수)
(○公庶弟善養 ○自註金鷄仲秋念五日送至 三聖臺而作) (공의 庶弟 선양이다. 自註:금계(金雞) 중추 25일에, 전송하며 삼성대(三聖臺)까지 왔을 때 지어 주었다. 金雞는 1621년 광해군13년을 가르킨다,. 念에는 스물 이라는 뜻도 있다)
若命新阡隔幾山(약명신천격기산) 신천을 명하면 몇 산만 격하게 되겠지만
隨波其奈赧生顔(수파기내난생안) 세파를 따르자니 얼굴이 부끄러워짐을 어찌 하리
臨分惟有千行淚(임분유유천행루) 이제 헤어지려 하니 천 줄기 눈물
灑爾衣裾點點斑(쇄이의거점점반)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아롱지는구나.
(新阡은 새로운 묘역, 새 밭두렁, 즉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말한다)
(時有納鍰 自贖之事 隨波卽指此也)(그 당시에 돈을 바치고 죄를 면하는 일이 있었으며 수파(隨波)란 이것을 가리킴)
我馬騑騑汝馬遲(아마비비여마지) 내 말은 내달리고 네 말은 더디건만
此行那忍勿追隨(차행나인물추수) 이 길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있으랴
無情最是秋天日(무정최시추천일) 제일 무정한 건 이 가을 해이니
不爲離人駐少時(불위이인주소시) 헤어지는 사람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네.
病中遺懷 一首(병중에 회포를 보내다)
居夷禦魅豈余悞(거이어매기여오) 거이어매(居夷禦魅)함이 어찌 내가 잘못된 때문이리오
戀國懷先每自虞(연국회선매자우) 나라와 선왕 생각에 매양 혼자 걱정할 뿐이지
莫怪踰山移住苦(막괴유산이주고) 산 넘어 괴롭게 옮겨 산다 괴이하게 생각 마오
望京猶覺一重無(망경유각일중무) 서울 바라봄에 그래도 한 겹 막힘이 없으니
(귀양살이하게 된 것이 고산 자신의 재명(才名)이 성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거이(居夷)는 거구이(居九夷)의 준말로, 누추하고 불편한 지역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동이족(東夷族)의 지역에서 살고 싶다고 하자〔居九夷〕, 어떤 사람이 누추한 곳이라고 걱정을 하니, 공자가 “군자가 살고 있다면 그 땅이 누추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대답했던 고사가 있다. 《論語 子罕》 어매(禦魅)는 어리매(禦螭魅)의 준말로, 유배를 당한 것을 뜻한다. 순(舜)이 요(堯) 임금의 신하가 된 뒤에 “네 흉족인 혼돈과 궁기와 도올과 도철을 귀양 보내 사방 변경으로 쫓아내어 도깨비의 재앙을 막게 하였다.〔流四凶族 渾敦窮奇檮杌饕餮 投諸四裔 以禦螭魅〕”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文公18年》 이 대목은 두보(杜甫)의 〈유회태주정십팔사호(有懷台州鄭十八司戶)〉에 “그동안 유배당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재명이 성해서 잘못된 때문. 선생도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의 부류라서, 또 세상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구려.〔從來禦魑魅 多爲才名悞 夫子嵇阮流 更被時俗惡〕”라고 한 시구를 발췌한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7》 대본에는 ‘居夷禦魅豈余娛’로 되어 있으나, ‘娛’는 ‘悞’의 잘못으로 보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고전번역원 이상현 역 참조)
끝으로 윤선도가 황학대라고 이름을 부치고 자주 찾던 기장 죽성리 바닷가 전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