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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2

경전선 2011. 1. 15. 13:11

다산 선생의 글을 읽다가 편지글 하나를 더 베껴왔다. (한국고전번역원(구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원문과 번역을 베겨 옴)

이 외에도 여러편이 있다. (큰아들 학연, 둘째 학유)

 

修身以孝友爲本。於是有不盡分。雖復學識高明。文詞彪炳。便是土牆施繢耳。我修旣嚴。其取友自然端正。同氣相求。不必加勉也。老夫閱世久。且備嘗囏險。周知人情。凡薄於天倫者。不可近不可信。雖忠厚勤敏。盡誠事我。切不可近。畢竟背恩忘義。朝溫暮冷。蓋天下之深恩厚義。未有加於父母兄弟。彼且輕偝之如彼。矧於朋友哉。此易知之理也。汝等切須記取。凡不孝子不可近。凡兄弟不深愛者不可近。觀人先察內行。若見其不是處。卽宜回光反照。怕我亦有是病。便當猛下功夫。昔我先人。與南居韓公特相友善。孝子也。亦粵我王考。與沙谷尹正字公特相友善。孝子也。用281_386d 保厥世。不失令名。及余之身。取友不端。礪鏃淬鋒者。多出疇昔之親交。吾是以悟之。
吾自布衣時。遭遇聖明。旣通籍。受知益深。密勿契合。多有外人所不能知者。畢竟謨猷籌略。無可以載之竹帛。銘之鼎彝。斯何故也。前哲有言。不在其位。不謀其政。易曰君子思不出其位。顧年少識淺。不知斯義也。嗟乎。悔將何及。事君之法。要爲君所敬。不要爲君所愛。要爲君所信。不要爲君所悅。朝夕昵侍者。君不敬也。詞賦奏技者。君不敬也。筆翰敏捷者。君不敬也。善承顏色者。君不敬也。重棄官職者。君不敬也。威儀不莊者。君不敬也。左右攀援者。君不敬也。雖復筵席之間。酬酢溫和。機宜之際。付囑祕密。心膂是託。爪牙是備。書札絡續。賜與便蕃。都不足恃之爲榮寵。不唯衆怒羣猜。菑害逮身。抑其一資半級。無所增益。何者。人主亦未嘗不辟嫌也。畜之如妾媵。使之如僕從。蓋勞頓獨多而登庸未易也。凡편001君子之起跡草野者。最好是時君不識何狀。文字進呈。唯論策等忠鯁剴切者无害。若雕蟲281_387a 篆刻之技。雖膾炙一世。是唯俳優之登場演戲者耳。
在微官末職。宜恪勤盡誠。在言地須日進格言讜論。上攻袞闕。下達民隱。或擊去官邪。須以至公之心爲之。執言宜從貪鄙淫侈中下手。不可偏據義理。黨同伐異。以敺人於坑阱。解官卽日還鄕。雖有切友同德。懇懇勉留。勿聽也。居家唯讀書講禮。蒔花種菜。引泉爲沼。累石爲山。或出典郡縣。務慈良廉潔。吏民俱便。或値國家大事。不편002夷險。效死盡節。若是者人主庸得不敬。旣敬矣。庸得不信。若夫桓公之於管仲。昭烈之於孔明。其道異是。彼唯千古數人。將人得而遇之哉。至於勳戚子弟。內託肺腑。豢畜如家人父子。逃遯不得。周旋宥密之地者。是固人臣之不幸際也。而顧願之哉。嘉慶庚午處暑之日。書于茶山東庵。

 

수신(修身)은 효우(孝友)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니. 이 점에 자기의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비록 학식이 고명(高明)하고 문사(文詞)가 아름답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흙담에다 색칠하는 것일 뿐이다.
내 몸을 이미 엄정(嚴正)하게 닦았다면 그 벗을 취(取)하는 것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일 것이다. 동기(同氣 여기서는 동류(同類)를 말함)는 서로 모이게 되는 것이므로 결코 특별한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이 늙은 아비가 세상살이 경험이 오래이고, 일찍이 어렵고 험난한 일을 두루 겪었기 때문에 인정(人情)을 모두 알고 있다. 무릇 천륜(天倫 부자(父子)ㆍ형제(兄弟)의 인륜(人倫))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믿어서도 안 되며, 비록 충후(忠厚)하고 근민(勤敏)하게 온 정성을 다하여 나를 섬기더라도,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끝내는 은혜를 배반하고 의리를 망각하여 아침에는 따뜻하게 대하다가 저녁에는 냉정해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 세상에 깊은 은혜와 두터운 의리로는 부모 형제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부모 형제를 저처럼 가볍게 배반하고 있는 처지에 더구나 벗에 대해서이겠는가. 이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이치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이 점을 기억하여 모든 불효자를 가까이하지 말고 형제끼리 깊이 사랑하지 않는 자와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먼저 가정에서의 행실을 살펴야 한다. 만약 그의 옳지 못한 점을 발견하면, 즉시 자신에게 비춰보아, 자기에게도 그러한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러지 않도록 힘차게 공부를 해야 한다.
옛날에 아버지께서 남거(南居) 한공(韓公)과 유별나게 서로 친하셨는데 이는 그분이 효자였기 때문이었고, 또 우리 할아버지께서 사곡(沙谷) 윤 정자공(尹正字公)과 유별나게 서로 친하셨는데 이 역시 그분이 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대로 가정의 명예를 보전하며 아름다운 명성을 잃지 않았는데, 내 몸에 이르러서는 벗을 취함이 단정하지 못하여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대부분 옛날 친하게 사귀던 사람들이니, 나는 이로써 취우(取友)의 방법을 깨달았다.
나는 포의(布衣) 때부터 어진 임금의 알아줌을 만났고 벼슬길에 오른 뒤에는 더욱 깊이 알아주심을 입어, 부지런히 보필한 것이 상(上)의 뜻에 맞은 것을 타인이 알 수 없는 바가 많았으나, 끝내 국가를 위한 계책(計策)들이 죽백(竹帛 역사책)에 실리지도, 정이(鼎彝)에 새겨지지도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옛 철인(哲人)이 말하기를,

“그 지위에 있지 않고서는 그 정사(政事)를 계획하지 않는다.”

하였고, 《역경(易經)》에,

“군자는 생각하는 바가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그때만 해도 나이가 젊고 식견이 얕아서 이러한 의미를 알지 못했었으니, 슬프다!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을 섬기는 방법이란 임금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임금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임금에게 신임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임금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모시고 있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아니하며, 사부(詞賦)를 잘 읊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아니하며, 글씨를 민첩하게 쓰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임금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거듭 관직(官職)을 버리고 가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위의(威儀)가 장엄하지 않은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으며, 측근 신하의 세력에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지 않는다.
또 연석(筵席)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이 온화하고, 형편에 알맞을 때에 비밀스레 부탁하며 마음과 몸을 의탁하고, 보좌 역할을 다 맡기면서, 서찰(書札)이 연이어지고 하사품이 아무리 잦아도 모두가 임금의 은총이라고만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뭇 사람들이 시기하여 재해가 몸에 미칠 뿐만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한 품계나 반 등급도 더 보탬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임금도 역시 혐의를 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첩처럼 기르고 종처럼 일을 시켜 수고로운 일만 도맡아 할 뿐 재상(宰相)으로 올려 쓰이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무릇 사군자(士君子)로서 초야(草野)에서 갓 출신(出身)한 자가 가장 좋은 것이니 이때에는 임금이 어떤 인품임을 알지 못하므로 문자(文字)를 올려바칠 때 논책(論策) 등에서 성실하고 강직(剛直)하고 개절(凱切)하게 하여도 해가 없는 것이다. 미사여구로 문장이나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는 비록 한 시대에 회자(膾炙)된다 하더라도 배우가 무대에 올라 우스갯짓을 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있어서는 온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관사에 힘을 써야 하고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날마다 격언(格言)과 당론(讜論 곧고 바른 의논)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과실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 혹 사악한 관리를 공격하여 제거시키되 모름지기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해야 하며,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것만을 지적해야지 치우치게 의리(義理)에만 의거하여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이면 편을 들고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이면 공격해서 함정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벼슬에서 해임되면 그날로 고향에 돌아가야 하고, 아무리 친한 벗이나 동지(同志)가 간절히 만류하더라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에는 책도 읽고 예(禮)도 익히면서 틈틈이 꽃과 채소를 가꾸기도 하고, 샘물을 끌어다 연못도 만들고 돌을 쌓아 산도 만들며 지내면 된다. 그렇게 지내다가 혹 군(郡)이나 현(縣)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면 자애롭고 어질며 청렴 결백하게 다스려 아전과 백성들 모두가 편안하도록 하며 혹 나라에 큰 일을 당하게 되면 평탄하고 험난함을 꺼려 말고 죽음을 무릅쓰고 절의(節義)를 다할 뿐이니, 이와 같이 하면 임금이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미 존경을 한다면 어찌 신뢰하지 않겠는가?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에게와 한(漢) 나라 소열 황제(昭烈皇帝)가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대한 경우는 그 도(道)가 이런 것과는 다르므로 저들은 천고에 몇 사람일 뿐이니, 사람마다 그러한 제우(際遇)가 가능하겠는가?
훈척(勳戚)의 자제들에 이르러서는 안으로 폐부처럼 결탁되고 가인(家人)이나 부자(父子)처럼 양육되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형편으로 가까이 모시면서 주선해야 하는 자들이니 이는 참으로 신하로서의 불행한 만남이다. 너는 그리되기를 원하는가?

가경(嘉慶:청 나라 인종의 연호) 경오년(1810, 선생 49세) 처서(處暑)에 다산(茶山)의 동암(東庵)에서 쓰다.

[주D-001]정이(鼎彝) : 공적이 있는 사람의 사적을 새겨 종묘에 갖추어 놓는 솥과 술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