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

(베껴온 글) 예기

경전선 2010. 3. 1. 08:45

요즘 직장에 너무 禮가 무너지고, 실망스러운 모습이 눈에 띄어서 禮에 관한 글을 써 볼까 하다가 발견한 글이다.

고들빼기라는 분의 불로그 http://blog.ohmynews.com/songpoet/category/11891 에서 베껴온 글이다.

 

머리말


 

예란 무엇인가.

점잖은 사람이라든지 예의가 바르다는 말을 흔히 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예(禮)로서 서라(立於禮)고 하였다. 그는 아들 백어(伯魚)에게 예가 아니면 설 수 없다며 학례(學禮)를 일러 준다. 또한 이 당부로 『논어』는 끝을 맺는다(不知禮, 無以立也).

입어례(立於禮)의 예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녀야 하는 사회성이랄 수 있다. 사회성을 지닌 공자식의 군자나 성인(成人)은 높은 도덕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안연(顔淵)은 공자가 자신을 문(文)으로 넓혀주시고 예(禮)로서 졸라매 주시었다고 하였다(博文約禮). 또 극기복례로 날마다 인(仁)을 실천하라. 그러면 천하가 아름다워진다(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안연은 공자의 이런 말을 실천하는 표상이라 하여 후대인들이 아성(亞聖)이라 불렀다.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다양한 종교의 보편적 특징을 이렇게 규정한다. 종교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함이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공동체 구성원에게 근본주의와 배타성을 요구한다. 공자도 딱딱한 의례를 강조한다. 부모를 섬김과 상례, 제례는 예로써 해야 한다(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 그리고 공자는 예를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유구한 역사를 끌어 들인다. 즉 당시 주(周)의 예(禮)는 하례(夏禮)와 은례(殷禮)를 계승했음을 밝힌다.

나는 공자의 이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하(夏)의 실재는 알 수 없다. 전고가 분명하지 않은 은례(殷禮)는 누가 알았단 말인가. 만약 이를 재구한다면 동이(東夷)의 은례(殷禮)는 주례(周禮)와 뚜렷하게 달랐을 것이다. 차이나는 지금 동북공정에 몰두한다. 지나인들에게 이는 낯선 일이 아니다. 공자가 그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고힐강(顧頡剛, 1893~ 1981)이 『고사변』에서 설파하였듯이 차이나의 역사는 후대로 갈수록 길어지고 정확해진다. 이 초석을 공자가 맨 먼저 놓았다. 그가 요순(堯舜)을 말하자 사마천이 발전적으로 계승한다. 그는 황제(黃帝)라는 상상적 실재를 요순보다 앞선 자로 구성하고 『사기』의 첫머리에다 써 넣는다. 나는 사서오경과 통감을 읽고 가르쳤다. 그래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공자가 역사 왜곡의 주범이라는 것을… 『고사변』에서 이를 재확인하던 날의 기쁨은 컸다.

지나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바는 석가나 예수 같은 인격체가 아니다. 시간이다. 태고(太古)다. 시간의 성의(聖衣)를 입음으로써 예(禮)도 성화(聖化)된다. 이 황당한 문화체계는 동이(東夷)와 화하(華夏)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동이 겨레의 땅으로 들어온 차이나 족들은 모두 자신들의 의례가 행해지는지를 관찰하고 보고서를 남겼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쓰던 사관들도 그러했다. 부여, 백제, 고구리(高句麗), 읍루 등에서 두(豆)를 사용하는지, 자신들의 예를 숭상하는지에 관심을 쏟았다. 그후 지속적으로 강요하였다.

한편 예는 통치 수단이었으므로 이데올로기로서의 구실을 훌륭히 수행한다. 때로는 억압적인 통치 방법이었다. 통치자들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을 부리기 쉽다(上好禮, 則民易使也). 백성들을 덕으로 이끌고 예로서 다스리라(道之以德, 齊之以禮). 이상은 예가 무엇인지를 『논어』를 통해 고구해 본 췌사이다.


 

『예기』의 유래도 공자에서 잡는다. 사기 공자전에 공자가 예를 지었다고 한다. 『한서예문지』에는 한 무제(BCE140~BCE87) 말에 노나라 공씨구댁(孔氏舊宅)에서 발견하였다는 책의 목록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전하는 『예기』는 전한 선제(宣帝, BCE 73 ~ BCE 49) 때 대성(戴聖)이 지은 소대례(小戴禮)에서 비롯된다. 

BCE 136년 동중서의 헌책을 받아들인 한 무제(BCE140~BCE87)가 오경박사를 둔다. 유교의 규범으로 통일된 예(禮)가 필요하였다. 이에 한(漢)의 유학자들이 소제(昭帝 BCE86-74)와 선제(宣帝, BCE 73 ~ BCE 49)를 거치면서 완성한 것이 대성의 『소대례』이며, 이는 교범이 된다. 이를 정현(鄭玄, 127-200)이 『의례』, 『주례』와 함께 『소대례기』에 주를 달아 삼례(三禮)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기』라 하면 『소대례기』라 한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책은 『예기주소(禮記注疎, 漢 鄭玄 注, 唐 孔穎達 疎)』이다.

『예기집설(禮記集說)』은 송말원초의 진호(陳澔)가 썼다. 예기집설서(禮記集說序)를 쓴 해는 1322년이다. 그의 아버지 진대유(陳大猷)는 쌍봉(雙峰)선생이라 알려지는 요로(饒魯)의 제자이다. 지나(支那) 족은 한 무제 때 흥기한다. 그들은 100여 년에 걸쳐 예의 경전을 만든다. 진호(陳澔)가 『예기집설(禮記集說)』에 몰두한 이유도 유사하리라 본다. 이민족 겸제의 통고를 이 책에다 쏟았으리라.

그러므로 예(禮) 또는 예기(禮記)란 , 종교적 경전이면서, 정치적 이념서였으리라.


 

나는 경산군 와촌면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영천까지를 구만들이라고 한다. 경북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리라. 100여 리를 달려온 금호강이 구만들 사이를 흘러가는 모습은 신검(神劍)의 칼날처럼 번쩍이었다. 그 양쪽으로 해발 600~1000m의 산자락이 해일 같은 성벽이 되어 치달리는 곳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이보다 더 갖춘 데를 다녀 본 적이 없다. 산이 높으면 들이나 강이 없고, 들이 넓으면 산이 없지 않든가. 향리의 집성촌에는 지금도 500여 명의 족친들이 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으나 그들은 예를 실천하던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도시로 나가서 근대식 교육을 배운 자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사람다운 삶을 누리고 있었다.


 

李完栽 선생님께서 대구 향교에서 『예기』를 강하신다. 고명하신 선비님들께 참고용으로 졸저를 배부하신다고 하셨다. 『예기집설대전 2』가 너무 두꺼우므로 「왕제」와 「월령」만 보내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긴 머리말을 없애었으나 메추리 같은 모습이었다. 이에 짧은 머리말을 쓰게 되었다.

과문한 필자가 알기에는 차이나의 북경대학에도 일본의 동경대학에도 『예기』는 강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구 향교에서 예학의 맥을 잇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성스러운 일이겠는가. 공자는 십실(十室)의 작은 마을에도 자신보다 훌륭한 선비가 있으므로 경의를 표한다고 하였다. 심지어 천자의 수레도 마을을 지날 때 치달리지 못하였다. 수레를 몰던 차우(車佑)가  내려 진창길인 듯 조심스레 끌고 간다고 하였다. 이는 선비의 덕을 기리기 위함이다.

하마비(下馬碑)를 세운 참뜻이 여기에 있다. 높은 벼슬아치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함이 아니다. 밭 갈고 김매는 농투성이일지라도 그대보다는 덕이 높으니 겸허하게 지나가라는 뜻이었다. 휴가병이 되어 어느 겨울 찬바람 속에 동대구역에 내렸다. 나는 고향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리고 걸었다. 어진 선비들이 사는 곳이니 고개 숙이라. 하늘의 뜻임을 알 것 같았다.

향리에 사시는 덕 높은 선비님들께 글로나마 배알하옵나이다.


 

2010. 1. 25  宋 아무개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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