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유적

어찌 이역에서 짐승들과 섞이랴

경전선 2024. 9. 26. 13:48
영광나들이를 마친 버스는 다시 부산으로 달린다.
모두들 곤한 잠에 취해있고, 맨 뒷좌석의 나는 다시 폰을 만진다. 이러다보면 시간이 잘 가기에...
불갑사 상사화 축제장에서 수은 강항선생 부스를 만났다. 그곳에는 작년에 강항문화제 때 사용했던 강항선생 어록 켈리그라피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아무리 보아도 의문이 가는 작품이 있어서 사진을 찍어왔다가 부산행 버스 속에서 되찾아 본다.

安能胳域混牛羊(안능각역혼우양)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말 해석에는 ‘어찌 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가 있는가’라고 되어 있다.
*胳 겨드랑이 각
그래서 더 고전번역원 DB를 검색해 본다.
睡隱集 看羊錄 涉亂事迹(섭란사적, 난리를 겪었던 일을 기록)에 나온다.
'胳域'은 '異域'의 오기였다. 그래야 시의 의미도 무난하다.
이 기회에 고전번역원 해석을 베껴와 보았다.
春方東到恨方長 봄이 금방 동으로 오니 한이 금방 길어지고
風自西歸意自忙 바람 절로 서쪽으로 부니 생각도 절로 바쁘구나
親失夜筇呼曉月 밤 지팡이 잃은 어버이는 새벽달에 부르짖고
妻如晝燭哭朝陽 낮 촛불처럼 아내는 아침 볕에 곡을 하리
傳承舊院花應落 물려받은 옛 동산에 꽃은 응당 졌을 것이고
世守先塋草必荒 대대 지킨 선영에는 풀이 정녕 묵었으리
盡是三韓侯閥骨 모두 다 삼한이라 양반집 후손인데
安能異域混牛羊 어찌 쉽게 이역에서 우양과 섞이겠나
그런데 이 시는 강항의 시가 아니고, 일본에 붙잡혀간 전라좌병영 虞侯(우후) 李曄(이엽)의 시라고 강항은 소개해 놓았다.
이엽은 탈출하다가 잡혀 죽었는데, 출발 전에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강항도 이 시에 감명을 받아 차운시를 짓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의 3,4구 해석은 좀 어렵다. 晝燭(주촉)은 낮에 촛불을 켜봐야 제 역할을 못 하듯이 인생의 의미가 전혀 없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실의에 빠져 곡을 한들 부질없는 짓이라는 뜻인가 보다.
다른 해석은 없을까?
아무튼 마지막 구절이 주는 메세지가 아주 강렬할 뿐만 아니라, 혹시 誤字 작품 사진이 떠돌지 않을까 생각되어 무료함도 달랠 겸 적어 보았다.
(推記)
돌아와서 간양록 원문을 더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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