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儒敎 정치의 꽃 - 淸白吏를 만나러 가자 (정옥자 교수)

경전선 2010. 5. 22. 07:30

 

儒敎 정치의 꽃 - 淸白吏를 만나러 가자 .

 

청백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전형이다.
그 고결한 품격과 멸사봉공의 정신은 우리 사회의 버팀목으로 세워야 할
아름다운 전통이다.


확인된 청백리의 수는 160여 명이다. 장관급인 판서가 30명 이상으로 가장 많은데 그중에서도 인사담당인 이조판서가 제일 많다. 그 외에 영의정(13명)·좌의정(7명)·우의정(3명) 순으로 오늘날의 총리·부총리·장관과 같은 고위직에 있던 인사들이 평가대상이었다.
  
  
  [청백리의 의미]
  
  
  사대부의 이상적인 역할 모델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선비(士)로 불렸고 선비정신을 함양한 관료 예비군이었다. 선비란 신분적으로는 양인이고,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주층이다. 性理學(성리학)을 主전공으로 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학인으로서, 士(사)의 단계에서 修己(수기: 인격과 학문을 닦음)하여, 大夫(대부)의 단계에서 治人(치인: 남을 다스림)하는 「修己治人」을 근본으로 하여 학자관료인 士大夫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사대부의 이상적인 역할모델이 淸白吏(청백리)였다.
 
  청백리는 貪官汚吏(탐관오리)의 반대어이다. 오늘날과 같이 총체적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탐관오리는 친숙한 존재지만, 청백리는 아득한 옛날 존재하였으나 이제는 그 의미마저 形骸化(형해화)되었거나 골동품쯤으로 퇴색했다.
 
  청백리도 시대의 산물이다. 「청렴결백한 관리」라는 글자 그대로 청백리는 관료제 사회의 산물이므로 귀족제 사회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귀족·관료제 사 회라 할 수 있는 고려시대에 청백리의 전 형태인 良吏(양리)가 배출되고, 고려사에 「良吏傳(양리전)」으로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간형들은 과거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조선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청백리에 錄選(녹선)하는 일이 국가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청백리는 국가적 포장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어 존경의 대상이었다. 청백리에 녹선되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家門의 영광이요, 자손까지 국가의 특전을 받았다.
 
  반면 탐관오리의 다른 명칭인 「贓吏(장리)」의 명단에 이름이 오르면 贓罪(장죄)를 범했다고 하여 본인이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은 물론 그 자손까지 벼슬길이 막혀 신분하락의 불이익을 당했다.
 
  장죄의 경중에 따라 다르지만 과거시험을 보았을 때 신원조회에 걸려 실력이 있음에도 탈락하거나, 설사 통과한다 하더라도 중요 직책에서 제외되었다. 「贓吏錄(장리록)에 오르면 3代를 顯官(현관)을 못 한다」는 말이 상식으로 통했던 것이다. 
  
  
  청백리는 160여 명, 주로 고위 관료 
  
  조선시대 청백리에 대한 국가적 현창은 中宗대부터 본격화했다.
 
  中宗 반정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일단의 선비그룹인 사림파가 그 이상을 실현하는 구체적 장치로서 청백리의 녹선을 서둘렀다. 시기를 소급해 선대왕들 때의 청백리를 가려 정리 작업을 했을 뿐만 아니라 대상도 상위직책으로 했다. 삼정승·육판서 등 고위 관리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조의 핵심관료, 對民(대민)업무가 많은 지방관이 主대상이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淸儉(청검)의 덕을 숭상한다면 아랫사람이 자연스럽게 다투어 숭모할 것이다. 전날의 청백리 자 손은 마땅히 먼저 녹용토록 하여라』 하는 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만고불변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현재 각종 기록에서 확인된 청백리의 수는 160여 명이다. 장관급인 판서가 30명 이상으로 가장 많은데, 그중에서도 인사담당인 이조판서가 제일 많다. 이는 청백리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어떤 직책보다 유혹이 많고 뇌물공세가 심한 자리에 있으면서 세도가의 인사 청탁이나 뇌물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깨끗이 공평무사하게 지켜낸 인사 관리직 관리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 외에 영의정(13명)·좌의정(7명)·우의정(3명) 순으로 오늘날의 총리·부총리·장관과 같은 고위직에 있던 인사들이 평가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의정부와 6조, 서울의 2품 이상 당상관 및 사헌부와 사간원의 長이 천거하여 피천인이 되고, 최종적으로 국가에서 뽑아 명단에 올리는 것이 일반적 수순이었다. 또한 「살아서는 廉謹吏(염근리)로 별도로 포상하고, 죽은 후에 청백리로 그 자손을 녹용한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조선 전기에는 구별이 없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러한 차별성이 생긴 것이다.
 
  특히 지방관을 청백리에 뽑을 때는 守令七事(수령칠사)라 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했는지(農桑蠶), 호구가 증가했는지(戶口增), 학교를 일으켜 세웠는지(學校興), 군정을 닦았는지(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했는지(賦役均), 송사를 간단히 했는지(詞訟簡), 간교하고 교활한 일을 없앴는지(奸猾息)를 따져 백성의 삶에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중요한 잣대로 작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은 청렴이었으니,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1762-1836)도 그의 저서 「목민심서」 律己(율기: 자신을 단속함)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청렴함은 수령의 본무이고 만 가지 선행의 근본이자 여러 가지 덕행의 뿌리이다. 청렴하지 못하면서 지방수령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관리 중에서도 백성과 가장 가깝게 접촉하는 지방관청의 책임자야말로 청렴이 기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선비의 시대이고 「맑을 청 (淸)」자야 말로 조선 선비들이 가장 사랑하던 글자이다. 선비정신은 맑음의 미학에 기초하고 있다.
 
  청백리를 비롯하여 「淸貧(청빈)」이 있다. 또한 선비들의 여론을 지칭하는 「淸議(청의)」, 글로써 벼슬하는 文翰官(문한관)을 가리키는 「淸職(청직)」, 혼탁한 무리들과 스스로를 구별하여 깨끗함을 자부하는 무리를 표현하는 「淸流(청류)」, 병적으로 결벽한 것을 일컫는 「청광(淸狂)」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청백리가 단연 돋보인다.
 
  이제 청빈은 미덕이 아니라 청백리와 함께 궁상맞음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지만, 과소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한번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정과 비리에 대한 불감증에 걸린 사회에서 청백리를 기대한다면 緣木求魚(연목구어)라 비웃음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망국병이라 할 부패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국민의식 개혁과 사회구조 개혁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당위라면 前者를 위해 청백리상을 조명하고, 後者를 위해 부패방지법에 해당하는 贓吏에 대한 법적·사회적 禁錮法(금고법)을 참고 삼을 만하다. 前者가 권장사항이라면 後者는 법적 규제이므로 법치국가에 사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더욱 현실적으로 실감되는 부분이다. 
  
  
  [淸白吏의 원형: 선비의 특징]
  
  
  先公後私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지식인은 선비(士)로 이해되고 있다. 선비는 오늘날의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된다. 특히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던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 있는 청정한 마음가짐으로 특징 지워진 선비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선비정신이 관료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어떤 일에 임할 때는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개인적인 일을 뒤로 하는 先公後私(선공후사)의 정신과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부추겨 주는 抑强扶弱(억강부약)의 정신을 들 수 있다.
 
  위기에 처해서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투철한 기개를 보여 주는 강인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생활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어서 그야말로 外柔內强(외유내강)한 개성을 갖고 있는 인간형이 선비의 전형인 것이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누구에게나 잘 대해 주고 예의바르지만 속으로는 강하고 심지 깊은 유형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 공존·공생하자
  
  또한 선비는 薄己厚人(박기후인)의 가치지향을 갖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고 남에게는 후하게 하는 생활태도를 말한다. 자신이 청렴하다고 해서 남에게 뽐내고 보통사람에게 청렴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관직을 이용한 자신의 부정부패에는 절제와 극기를 하였지만, 어려운 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운 잣대와 태도를 갖고 있었다. 연말에 뇌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歲饌(세찬)이라 하여 아랫사람들을 챙겨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향하는 최종적 목표는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이겨 내어 禮(예)로 돌아가는, 즉 克己復禮(극기복례)하여 모든 사람이 공존하고 공생하자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시킬 때 인간은 남을 괴롭히거나 남의 生을 파괴하게 되므로 자신을 이기는 克己의 길만이 남을 존중하고 인간 상호 간의 愛敬(애경)을 극진히 하는 禮로 돌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중요하듯이 타인의 삶도 중요하므로 자신과 타인이 다 함께 이 세상에서 사이좋게 生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을 갖고 그러한 인식을 확대시킴으로써 天人合一(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하늘」이란 종교적 절대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말하며, 사람이 자연의 질서 속에 조화되어 하나로 된 경지를 말한다.
 
  선비는 그러한 이상사회인 大同社會(대동사회)를 이 세상에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 전위가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던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제자백가사상의 논리들은 인류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제사상의 원론을 기본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사상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유가사상이 동양의 主流사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상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적 면모에 기인한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의 정신이다. 「옛것을 제대로 알고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기본적인 태도야말로 안정성의 기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살펴보더라도 18세기 朴趾源(박지원)에 의하여 제창된 「法古創新(법고창신)」의 논리라든가 19세기 「東道西器論(동도서기론)」, 1894년 갑오경장 후 제기된 「舊本新參(구본신참)」의 논리가 모두 그러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서세동점에 대응한 이러한 조선 지식인들의 모색마저 20세기 제국주의의 틀 속에 함몰되고 근대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동양사회는 1세기 이상 서구 이념의 각축장이 되어 표류했다.
  
  
  [淸白吏를 위한 교육: 선비 만들기]
  
  
  「격몽요결」이 선비의 修身 교과서
 
  청백리가 선비정신의 구현일진대 청백리 교육은 선비교육에서 비롯된다. 선비의 修己는 「小學(소학)」에서 시작된다. 「小學」은 초등학교 정도의 어린이에게 청소하는 법과 어른을 모시는 법, 나가고 들어가는 법 등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행위규범부터 가르쳤다.
 
  적어도 자신이 자고 난 이부자리는 자신이 개어 올리고, 자신이 흘린 찌꺼기는 자신이 치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분을 초월한 것으로 어느 면에서는 양반 家門에서 더욱 철저하게 요구되었다.
 
  어른에 대한 예절을 강조하는 구체적 행위로서 어른의 부르심에 공손히 대답하고, 쫓아가 가르치심을 받들고, 손님이 오시면 나아가 공손히 맞고 자리에 모시며, 나가고 들어갈 때의 행동거지를 단계별로 규정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性理學을 國學으로 하였던 조선사회에서 「小學」을 어린아이의 修身 교과서로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性理學이 조선에 토착화하는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 선비의 입장에서 당시의 조선 현실에 맞는 修身 교과서가 출현하였으니 「擊蒙要訣(격몽요결)」이 그것이다. 栗谷 李珥(율곡 이이·1536~1584)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 책은 뜻을 세우라는 「立志(입지)」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九容과 九思
 
  아울러 몸가짐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九容」(구용: 손발,이목구비 등 신체부위의 바람직한 모습을 아홉 조목으로 설명함)과 생각하는 방법을 제시한 「九思」(구사: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 조목) 등의 항목은 당시 선비들이 받은 교육의 내용이 손에 잡힐 듯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九容이란 몸과 마음을 수렴하는 데 절실한 아홉 가지 항목이다.
 
  첫째, 발 모양은 무겁게 할 것(足容重). 가볍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어른 앞에서 걸을 때는 여기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른 앞에서 거드름피우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손 모양은 공손히 할 것(手容恭). 손을 아무렇게나 놓지 않고, 일이 없을 때는 단정히 앞으로 모으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셋째, 눈 모양은 단정히 할 것(目容端). 눈동자를 안정시켜 마땅히 시선을 바르게 해야 하며 흘겨보거나 훔쳐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넷째, 입 모양은 움직이지 말 것(口容止).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니면 입은 항상 움직이지 말고 꼭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소리는 조용히 낼 것(聲容靜). 마땅히 형기를 가다듬어 구역질을 하거나 트림을 하는 따위의 잡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섯째, 머리 모양을 곧게 할 것(頭容直). 머리를 바르게 하고 몸을 곧게 해야 하며 머리를 기울여 돌리거나 치우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숨쉬는 모양을 엄숙하게 할 것(氣容肅). 호흡을 고르게 하여 소리를 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덟째, 서 있는 모습을 덕스럽게 할 것(立容德). 가운데 서고 치우치지 않아서 엄연히 덕이 있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홉째, 얼굴 모양을 장엄하게 할 것(色容莊). 얼굴빛을 단정히 하여 태만한 기색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상 九容은 신체의 손발 등 각 부위의 모양을 어떻게 가꾸어야 우아하고 품위 있는 선비가 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어 일거수일투족을 빈틈없이 규정하고 있다.
 
  九思란 지혜를 더하기 위한 구체적인 아홉 가지 실천요목이다.
 
  첫째, 볼 때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할 것(視思明). 사물을 볼 때 가린 바가 없으면 밝아서 보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둘째, 들을 때는 귀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할 것(聽思聰). 들을 때 막힌 바가 없으면 귀 밝아서 듣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셋째,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할 것(色思溫). 얼굴빛을 온화하고 부드럽게 하여 화를 내거나 거친 기색이 없도록 할 것이다.
 
  넷째, 모습은 공손히 할 것을 생각할 것(貌思恭). 일신의 태도가 단정하고 씩씩하게 할 것이다.
 
  다섯째, 말은 충실하게 할 것을 생각할 것(言思忠). 한마디 말이라도 충신하지 않음이 없도록 한다.
 
  여섯째, 일은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할 것(事思敬). 한 가지 일이라도 경건하고 삼가지 않음이 없도록 할 것이다.
 
  일곱째, 의심나는 것은 물을 것을 생각할 것(疑思問). 마음속에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깨달은 이에게 나아가 자세히 물어보아 모르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여덟째, 분할 때는 어려움을 생각할 것(忿思難). 분이 나면 반드시 징계하고 이치를 따져서 스스로 이겨 내야 한다.
 
  아홉째, 얻을 일이 있으면 옳은지 생각할 것(見得思義). 재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義(의)인지 利(이)인지 분변하여 義에 맞는다고 판단한 후에야 갖는다.
 
  九思란 사물을 관찰하고 행동할 때 그 전제로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일상사를 자세하게 규정하였다. 결론적으로 九容과 九思는 마음속에 두고 몸을 단속하여 잠시라도 놓아 버려서는 안 되며 항상 앉는 좌석 옆에 써놓고 때때로 눈을 돌려 보아야 하는 修身의 기초 조항들이라는 것이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
 
  나아가 이들이 기본 교과서로 채택하였던 「四書三經(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들의 내용은 「大學(대학)」의 주요지침인 修身(수신)·濟家(제가)·治國(치국)·平天下(평천하)를 실천하기 위한 이념서이자 지침서라 할 수 있다.
 
  특히 통치자의 학문이라 할 수 있는 「大學의 조선적 변용인 「聖學輯要(성학집요)」의 출현은 외래사상으로서의 性理學이 토착화되었다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16세기 후반 栗谷 李珥에 의하여 조선화한 性理學을 「조선 성리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후 조선사회의 전개과정은 그 이념의 실현과정이라 하여도 크게 볼 때 별 무리가 없다.
 
  인류의 삶이란 시행착오의 연속선상에서 전개되고 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간 일을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중시로 나타났다. 「經經緯史(경경위사)」 정신의 강조가 그것이다. 경전의 진리가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전제하여 날줄로 인식하고, 시간에 따른 변화양상을 역사로 인식하여 씨줄로 인식했다.
 
  예컨대 眞善美(진선미)라든지 孝道(효도)와 같은 인류 보편적인 진리는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經學)과 역사를 상호보완하여 인간사를 파악하는 경경위사의 정신이야말로 동양사회가 면면하게 지켜온 인문정신이며 동양의 정신문화를 고양시킨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經學과 역사를 학문의 중심축으로 삼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매체로서 文章學(문장학)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경학과 역사의 메시지를 道(도)로 인식하고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문장학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전공 필수 文·史·哲 , 교양 필수 詩·書·畵
 
  문장은 경학에서 추구되는 이념과 역사에서 제시하는 진리를 담아 내는 그릇으로서, 그 관계는 道器論(도기론)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시대에 따라서는 내용보다 포장이라 할 수 있는 문장학이 성행해 부박하고 화려한 文辭(문사)만을 나열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통시대적으로 볼 때 文(문)·史(사)·哲(철)은 같은 비중으로 추구되는 전공필수였다.
 
  이러한 교육이 이성훈련의 극대화라고 볼 때, 그 방법이 「格物致知(격물치지)」였다. 「格物」이란 사물의 이치를 알기 위하여 관찰하고 실험하는 단계로서 앎의 기초가 되는 것이고, 그 결과 진정한 앎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致知」라 할 수 있는데 그 중간단계가 이치를 끝까지 추구해 나가는 「窮理(궁리)」이다.
 
  격물·궁리·치지를 통하여 세상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명징한 자기성찰이 가능하여 완벽한 인격을 갖춘 인간형에 도달한다 해도, 그러한 합리성만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그래서 詩(시)·書(서)·畵(화)를 통한 감성훈련을 중요시하였다.
 
  詩社(시사)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詩會(시회)를 열고, 漢詩를 지어 글씨로 써서 남기고, 그림을 그려 서로 돌아가며 감상하는 등 일련의 예술행위를 통하여 풍부한 정서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메마르기 쉬운 학자생활에 윤기를 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文·史·哲의 전공필수를 보완하는 詩·書·畵가 교양필수가 되어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인간형이 선비의 이상형으로 추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추구한 이상적 인간형은 감성의 발현인 「人情(인정)」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옳은 도리인 義理(의리)를 잘 조화시키는 사람이었다. 너무 人情에 치우치면 기준이 모호해져 부패하기 쉽고, 義理만 따지다 보면 세상살이가 삭막해져 살맛이 안 나게 마련이다.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부드러우면서도 기준이 있고, 따질 일은 분명하게 따지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가진 균형 감각이 있는 인간이야말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청백리도 이러한 준거틀 속에 존재했던 것이지 무조건 청렴만 강조하는 독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신봉하는 합리주의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흑백논리와 양극적 태도를 지양하고 中庸(중용)의 정신을 높이 샀던 당시대 가치관의 표출이었다.
 
  우리가 흔히 조선 선비에 대하여 갖고 있는 「꼬장꼬장하다」, 「깐깐하다」거나 「꽁생원 」 같다는 표현은 조선말 亡國大夫(망국대부)가 된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자기 방어적으로 편향된 지식인상이다.
  
  
  [士大夫의 길: 청백리의 길]
  
  
  科擧, 山林의 길 통해 관직에 오른다
 
  조선 지식인의 진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선비가 선택하던 科擧(과거)를 보는 것이다. 20세 전후에 자격시험의 성격을 갖고 있던 小科(소과)시험을 보았다.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 정도를 시험하던 生員試(생원시)는 학자적 소양을 가진 사람이, 문장이나 詩 등 문학에 치중하던 進士試(진사시)는 문장가의 소질을 가진 사람이 선택했다.
 
  생원·진사의 小科에 합격한 사람은 성균관에 입학하여 기숙사인 東齋(동재)와 西齋(서재)에서 생활하는 館學齋生(관학재생), 즉 국비 장학생이 되거나 다시 귀향하여 大科(대과)시험을 준비하였다.
 
  최종적으로는 大科인 文科(문과)에 합격하여야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9품관부터 시작하는 학자 관료가 되었다.
 
  「文槐武宣(문괴무선)」이라고 해서 문과 합격자는 槐院(괴원), 즉 承文院(승문원)에서 출발하고, 무과 합격자는 宣傳官(선전관)에서 시작해야 고위직까지 진출하는 정통으로 여겼다.
 
  또 하나의 진로가 蔭職(음직)인데,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 음직은 미관말직인데다 본인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겨 음직으로 출발했더라도 다시 과거를 보아 정당한 길을 찾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다.
 
  둘째, 山林(산림)의 길이다. 선비의 복수개념인 士林(사림)이 정계·관료계에 대거 진출한 조선중기에 이르면 과거를 보지 않고 중장년이 되도록 학문에만 전념하는 대학자를 山林이라 차별화하여 우대했다. 이들은 세속적인 출세의 길이 되어 버린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몇십 년씩 공부하여 그 학문적 능력으로 學界는 물론이려니와 政界까지 주도했다.
 
  이 때의 정파인 붕당은 학파를 모집단으로 했기 때문에 「학파⇔정파」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山林은 학파와 정파의 연합구도 속에 그 구심점이었으며 領袖(영수)였다. 岩穴讀書之士(암혈독서지사)로 불리던 山林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 후 17세기 위기상황에서 특탁되었다.
 
  인조 代부터 山林을 특채하기 위해 별정직을 만들었으니 성균관의 司業(사업: 종4품)이나 祭主(제주: 정3품 당상관), 세자시강원의 諮議(자의: 종7품)·進善(진선: 종5품)·贊善(찬선: 정3품 당상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극복하고 조선후기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국가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국민 상하가 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노력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했다. 17세기는 山林의 시대라 할 수 있을 만큼 山林들이 국가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대접받던 시대였다. 
  
  
  꺾일망정 휘어지기를 거부
 
  셋째, 선비의 부득이한 선택으로 隱逸(은일)이 있다. 국가를 경영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난세를 당하거나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인식하에 초야에 은둔해 있던 선비를 말한다. 隱士(은사)·逸士(일사)·遺逸(유일)로도 불린다.
 
  이들은 부도덕하고 무도한 통치자가 권력을 휘두를 때 정치판에 나아가는 일을 거부하였다. 자신의 시대를 난세로 인식할 때 취하는 길이다. 무도한 시대에 정치판에 뛰어들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와 지식이 난세를 연장시키는 데 일조하게 되거나 악용될 소지를 아예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폭정을 도와주는 결과를 우려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오염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꺾일망정 휘어지기를 거부하고 獨也靑靑(독야청청)하고자 하는 그 자존심은 曲學阿世(곡학아세)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 고대 周나라 姜太公(강태공)에서 시작되는 은일의 역사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많은 예화로 남아 있다. 그들은 대부분 낚시로 세월을 낚다가 때가 무르익어 자신을 알아 주는 知己(지기)를 만나 비로소 출사하여 마음껏 능력을 발휘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끝까지 믿어 준 통치자를 만났기에 가능하였던 것이고, 그런 이를 만나기 전에는 섣불리 자기 능력을 내보일 수 없다고 판단하여 忍苦(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인내력에 기초했다.
 
  이들은 대부분이 儒者(유자)들이며 조선시대 선비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을 알아 주고 발탁한 이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을 만큼 의리를 지키는 대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예 협조하지 않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의 선비의 처세는 處變三事(처변삼사)이다.
 
  은둔·망명·자결이 그것인데,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옳은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될 때는 擧義掃淸(거의소청)을 선택했다. 義를 일으켜 세워 敵을 쓸어 버리겠다는 이 마지막 결정은 선비의 정상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을 때의 극단적 방법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항쟁과 1895년 을미사변 때 國母(국모)가 시해되는 위기상황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들 수 있다.
 
  선비들은 의병장으로서 국민병인 의병을 조직하고 통솔했다. 직접 병장기를 들고 전투에 임하고 무예를 행하기보다는 병서에 대한 조예와 지리에 밝다는 이점을 이용하여 게릴라戰을 감행했던 것이다. 禮·樂·射·御·書·數(예·악·사·어·서·수)의 六藝(육예)를 닦는 것이 선비의 기본 익힘이었기 때문에 말 타고 활 쏘는 정도의 무예는 평소에 닦아 두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지원한 민간인으로 구성되었고, 민간자금을 군자금으로 확보하는 등 전적으로 민간차원에 의존했다. 
  
  
  최대 관심은 「公義」의 실현
 
  나아가 활동을 하든 물러나 숨어 있든 이 시대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정치 지향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치를 통하여 자기성취는 물론이려니와 국가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발상은 아주 상식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책임의식이었다. 자신들이야말로 사회 주도층이라는 의식은 매사에 진지하게 임하게 되고, 어떤 사안에 대하여든 냉소적이거나 책임 회피적이 될 수 없도록 했다. 그들의 최대 관심은 「公義(공의)」의 실현에 있었다.
 
  개인적인 욕망을 이겨 내고 나와 타인이 다 함께 이 세상에서 生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의 善(선)인 공적 의로움, 즉 公義를 실현하는 일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잣대가 위에서 언급한 人情과 義理라는 두 가지 기준이었다. 이 두 가지 기준이 정확하게 평형을 이룰 때 사람들은 소외감 없이 공평하게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그들의 실천은 「學行一致(학행일치)」로 시작된다. 배운 것은 행동으로 옮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하여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巧言令色(교언영색)이라 매도되기도 하였다. 교묘한 말과 좋은 얼굴색을 지어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거짓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인격을 도야하는 修己의 단계에서 선비정신의 핵심으로 강조되는 것이 淸貧(청빈)과 儉約(검약)이기 때문에 그것을 몸에 익힌 선비가 관리가 되어 學行一致의 원칙을 지켜 실천할 때 청백리가 탄생할 것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자신을 위해 마음껏 쓰고 남는 여유란 있을 수 없으므로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고 절약해야 남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청렴정신을 관직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수많은 청백리가 배출되어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청백리들의 예화]
  
  
  조선 초기의 청백리들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시대로 사회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하는 세종 代에는 청백리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세종 같은 聖君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黃喜(황희)·孟思誠(맹사성)·柳寬(유관)이다.
 
  이 세 사람은 우정도 돈독하여 절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똑같은 지향을 보여 주면서 세종 代의 태평성대를 이루어 내었던 것이다.
 
  黃喜는 40代 후반부터 50代 전반까지 10여 년 동안 육조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18년간이나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청백리의 귀감을 보여 주었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공조판서로 있던 김종서가 자기 소속 관아인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술과 유과를 마련하여 정승과 판서를 대접하게 하였다.
 
  이에 黃喜는 『국가에서 禮賓寺(예빈시)를 설치한 것은 접대를 위한 것이니 만약 시장하다면 예빈시로 하여금 음식물을 마련해 오도록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음식물을 제공한단 말이오?』 하고 엄격하게 문책하였다. 예산 외의 경비지출로 인한 부작용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조회에 모든 대신들이 비단으로 지은 새 옷을 입고 나왔는데, 黃喜 정승 만이 거친 베로 만든 관복을 기워 입고 나왔다. 다음날부터 모든 대신들이 헌 관복으로 갈아입고 출근하게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상징적인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이 미치는 영향력을 말해 준다. 
  
  孟思誠은 부인이 햅쌀밥을 해 올리니 『어디서 햅쌀을 구했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녹봉으로 받은 쌀이 너무 묵어서 먹을 수 없을 지경이므로 이웃집에서 꾸어 왔다』고 하자 그는 『이미 국가에서 祿米(녹미)를 받았으니 그것을 먹을 일이지 이웃집에서 꾸어 와서야 쓰겠소?』하며 부인을 나무랐다.
 
  公私 구별 없이 똑같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예화이다. 당시 병조판서가 좌의정이던 그를 찾아갔다가 자신의 행랑채와 방불한 그의 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
 
  우의정을 지낸 柳寬은 비가 새는 단칸 초가집에서 베옷과 짚신으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 어느 여름 한 달 이상 내린 비로 지붕이 줄줄 새자 柳寬은 우산을 들고 부인에게 『우산도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겠소?』 하니 부인이 『우산이 없는 집엔 다른 마련이 있답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대부분의 관리가 우산 걱정 같은 것은 할 필요조차 없는 집에서 살고 있는 줄 그 부부가 모를 리 없건만 시치미를 떼고 대화하는 모습이 유머러스하다. 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
 
  柳寬의 집은 「庇雨停」(비우정: 비를 겨우 가리는 정자)이라 이름하여 오늘날의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었다. 옛 집은 흔적 없지만 이름만은 부근 청계천 다리의 하나인 「비우교」로 남았다.
 
  이 세 사람이 모여 대화하며 우정을 다지던 곳이 지금 온양에 남아 있는 맹씨 행단이다. 아마도 평생의 知己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고 격려했을 것이다. 나아가 누가 더 청렴할 수 있는지 내기라도 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상호 간에 교감된 투철한 사명의식이었을 것이다. 속이 꽉 찬 사람에겐 허기증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落鄕의 미학
 
  이들 조선초기의 청백리들은 후세의 典範(전범)이 되어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청백리가 배출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청백리가 나온 가문은 자손들이 영광을 누렸고, 탐관오리 가문의 후손들은 신분조회에 걸려 顯官을 못 했고 결과적으로 가세가 추락했다.
 
  그들이 원칙주의자였던 만큼이나 좌절 또한 컸다. 살벌하다고밖에 표현하기 힘든 명분사회에서 자기 정합성을 잃어버리거나 논리적 정당성을 상실했을 때, 언관들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士林사회의 여론인 淸議(청의)에 밀려 사직소를 올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심하면 귀양살이, 그보다 더할 경우 사약을 받는 극한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사직할 경우 자신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이 있는 고향으로 落鄕(낙향)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곳에서 다시 修己를 시작하여 再충전의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관료 생활 하느라 소홀히 했던 학문연구와 자기 수양을 하면서 제자양성을 통해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유배되었을 경우 귀양 간 지방의 문화적 학문적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제자를 키우며 학문연구에 침잠했다. 이들의 학행은 고행에 가까운 것으로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여 주는 예화가 많다.
 
  사약을 받을 경우도 흔들림 없이 의연하여 入神(입신)의 경지까지 도달한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의 근저에는 어려서부터 닦은 완성된 인격체로서의 자기 확신이 있었다고 풀이된다.
 
  일제시대와 광복 후 현대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지식인들이 보여 주었던 체질적 한계와 현실 타협적 처신은 전통시대 지식인인 선비와 비교되면서 선비정신과 그 정신의 구현체인 청백리에 대한 再조명이 요청되고 있다.
 
  특히 30년간 지속된 군사독재 정권下에서 한국 지식인이 겪은 좌절감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지식인 자신들의 테크노크라트적 성격과 현실 안주의 타성에 기인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다.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그 이후의 정권들이 되풀이되는 만연한 부정부패에 국민들은 실망하고 있다. 이 난국을 돌파하는 정신무장의 방법으로 국민의 역사의식 속에 아직도 푸르게 아로새겨져 있는 청백리 정신을 끌어내어 활용할 필요가 있겠다. 
  
  
  청백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
 
  청백리의 시대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의 근저에는 의리와 명분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친화적 왕도정치와 문화정치를 지향한 문치주의가 깔려 있지만, 그 관료조직의 핵심부에서 부정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을 수행한 수많은 청백리들의 존재가 더 큰 비중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청백리 정신은 조선왕조의 정신력이었다.
 
  조선왕조는 신분적·경제적 차별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지만 크게 볼 때 동질성을 추구하는 사회, 함께 어우러져 살며 공생공존을 추구하는 대동사회를 기본방향으로 잡았다. 현세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긍정적 사고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향하여 분골쇄신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사대부였고 그 이상형은 청백리였다.
 
  이와 같이 동양사회의 지식인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통시대적으로 사회적·정치적으로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에 실현하려 했고, 또 많은 경우 실현했다. 항상 권력의 주변에서 참모의 역할에만 그쳤던 서양의 지식인들과는 토대가 달랐으므로 체질적인 차별성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은 우리 청백리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공직자 윤리의 엄정한 도덕률도 우리 전통에서 확인하여 典範으로 삼을 수 있다. 공직사회의 부패 방지는 청백리 정신을 일깨우고 청백리를 만들어 낸 조선시대의 인간 만들기의 역사를 再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청백리, 그 고결한 품격과 滅私奉公(멸사봉공)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버팀목으로 法古創新(법고창신: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해야 할 아름다운 전통이다.

--정옥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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