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오름이라는 닉네임의 블로그에서 퍼 온글인데, 내가 오자를 수정하고 조금 편집하였다.)
(이 말은 계사년(1593) 7월 16일 이순신이 진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다음날 지평 현덕승에게 올리는 답서에 나오는 글귀라고 한다>
호남인이 가장 긍지를 가지고 있는 말은 이순신이 언급한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일 것이다.
전라남도 각 시군 또는 각계인사들이 이 말 인용하기를 즐겨하면서 이 말의 출처가 국보 76호인 난중일기(亂中日記)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임진란 중에 이순신 장군이 표현한 문구이나 난중일기에는 그 말이 없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 말은 이충무공 전서의 끝 부분 부록 서한문(書翰文)편에 있는데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편지 답장을 쓰는 내용 중에 언급된 것이다. 이 편지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7월16일자이며, 김천일 의병장과 호남의 제장졸(諸將卒)들이 진주성 제2차 혈전에서 모두 순절했던 6월29일을 약 보름 지난 시기이다. 이 책은 1795 년(정조 19) 왕명에 의해 교서관(校書館)에서 장군의 유품을 정리하여 편집, 간행된 것이다.
"약무호남(若無湖南)이요 시무국가(是無國家)라" 직역하면 <만일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
그럼 원저를 보자.
李忠武公 全書(卷13) 附錄(5) 紀實(上)은 정조대왕의 명령으로 규장각문신 윤행필(후 이조판서)와 예문관검서관이 편찬 정조 19년에 출판하였다 여기에 '약무호남'이요 '시무국가'라는 문구가 나온다.
여기에 잠시 옮겨보자
舜臣每戰勝 輒戒諸將曰 狃勝必驕 諸將愼之(순신매전승 첩계제장왈 뉴승필교 제장신지)
순신은 언제나 싸움에 이길 적마다 모든 장수를 훈계하되 사람이 이기기만 하면 반드시 교만이 생기는 법이니 여러 장수들은 조심하라 하였다.
時賊屢窺湖南 舜臣以爲 國家軍儲 皆靠湖南(시적루규호남 순신이위 국가군저 개고호남)
그때 왜적이 자주 호남지방을 노리고 있음으로 순신은 우리나라의 군비는 다 호남을 의존하고 있는데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만일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先時 賊將平行長 到平壤投書曰 舟師十餘萬 又從西海而來未知 大王龍馭 自此何之(선시 적장평행장 도평양투서왈 주사십여만 우종서해이래미지 대왕용어 자차하지)
일찍이 적의 장수 行長(소서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편지를 보내어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쪽 바다로 올라오는데 대왕의 행차는 언제 어디로 갈 것이오,
盖賊本欲 水陸合勢西下 賴此一戰 遂斷賊一臂(개적본욕 수륙합세서하 뇌차일전 수단적일비)
대개 적의 본의는 수륙으로 합심하여 서쪽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이 한 싸움으로 말미암아 적의 한 팔이 끊겼으니
行長雖得平壤 勢孤不敢更進(행장수득평양 세고불엄경진)
행장 비롯 평양을 차지했지만 세력이 외져서 감히 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상이 李忠武公 全書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 호남 의병의 역할
둘째, 호남곡창의 군량미의 보급 역할
셋째, 해전을 승리로 이끈 휘하 장병이 모두 호남 출신이라는 점
임진란 시의 의병은 대부분 향토 방위전이었다면 호남 의병만은 국토 방위전에 참가하여 서울 수복과 진주성 전투 참가 등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점을 이순신이 그리 말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또 하나는 아군 3천명 대 적군 10만 명의 중과부적의 진주성 전투를 죽음으로 사수했던 나주의 김천일 의병장이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 곡창이 무너지고, 호남 곡창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고 최후 결전의 일성(一聲)을 한 것으로 보아 식량 즉 군량미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것인데, 그 당시 호남 곡창에서의 군량미 보급이 이순신의 해전 승리를 이끈 이유에서 그리 말했을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거북선을 만들고 남해안의 물때를 정확히 알고 있는 호남 어부 출신 제장졸 때문에 이순신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 말했을 것입니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오늘날 여수 땅인 전라좌수영에 부임해온 이순신은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자 국가 위급을 고려하여 관할구역 밖인 경상도 해전에 출전했습니다.
그리하여 5월7일 제1차 해전의 옥포 해전을 승리하였고, 5월29일 제2차 당포해전을 승리하였으며, 7월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소위 “학익진(鶴翼陣)의 전법”으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이룬 것이며, 9월1일 부산포 해전을 이기는 등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현덕승에게 보내는 답장편지는 수군장 초임으로서 연전연승의 승리를 이끌어낸 호남 제장졸의 해전 능력에 감탄했을 것 때문입니다.
어떻든 세 가지 이유가 호남 땅, 호남사람에 기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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