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째 오후에 만리장성으로 향한다. 시내에서 약1시간40분을 북쪽으로 달려간다. 잠시 회장님께서 교류전 공식일정에 관한 소감말씀이 있었고, 이어서 만리장성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여행 가이드 이야기를 하고 가자.
속된 말로 가이드 ‘아다리’가 좋아야 여행이 재미있다. 즉 어떤 가이드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흥미가 많이 좌우된다. 내가 맨처음 중국 땅을 밟을 때 항주 가이드는 수시로 중국어 연습과 얽힌 에피소드를 해주었다. 또 직장 덕분에 홍콩,심천을 갔을 때는 가이드가 버스에서 계속 즐거운 게임을 해기도 했었다. 한편 백두산을 갔을 때는 참깨 장사에 열중인 친구, 그리고 은근히 잘해 주는 척 하면서 결국은 옵션을 부풀려 덤테기를 씨우던 장가계 친구도 있었다. 한편 더운 날씨에 땀을 범벅하면서도 성실껏 설명을 해주던 캄보디아 선배, 여고동창생 모임이 오면 제일 좋다던 하롱베이 한량도 생각난다. 그리고 이번 제남 가이드 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아주 순진한 면이 있었다. 다만, 마지막 버스에서 한국에는 없다는 술을 판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그래도 열심히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 북경가이드 강○○는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기에는 망설여진다. 물론 길 안내와 통역 등 가이드의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내 잣대로는) 앎에 대한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만리장성 가는 길에 그는 대~충 설명하고 나서는 잠이 들어버리기도 했다. 우리들이 다름아닌 약간은 범상한 취미를 가진, 고전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므로, 거기에 맞추어 주로 그런 쪽의 유적, 역사이야기를 좀 더 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우리 눈높이 욕심이 너무 높았나?)
한편, 만리장성 가는 길에 노래를 곁들여 흥겹게 가자는 건의가 있엇는데, 버스에서 내가 잠시 마이크를 잡았다. 점심을 거나하게 먹은 술 기운은 탓인지 버스 뒷쪽에서는 잠이 골아 떨어진 분들이 다시 눈을 떴다.
나는 연장자 분들이 계시는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 소재는 열하일기와 전날밤 나의 생각.....
이제,그 때 버스에서 했었던 이야기, 열하일기에 대하여 좀 더 적어보자.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5년)에 燕巖 朴趾源이(당44세) 청 건륭황제 칠순잔치에 축하사절로 갔다가 거기에서 보고들은 중국의 이색 느낌을 상세한 문체로 적은 여행기이다. 박지원은 원래 출신 집안이 대단한 가문이었으나, 천성이 구속받기 싫어하고 답답한 관리 체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문장을 썼고, 正使로 가는 3종형(박명원)을 따라서 그냥 특별한 직책(의무)도 없이 따라나섰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중국 갖가지(서역에서 온 문물까지) 물건들이다. 코기리, 벽돌로 집을 짓는 것, 주막집 풍경 등 .... 등 사소해 보이는 것도 묘사를 잘 해둔 책이란다.
특히 건륭황제가 연경에 있는 알았는데, 가서보니 피서산장인 熱河(요즘의 승덕)에 머물기 때문에 8월13일 생일잔치에 맞주기 위해서 하룻밤에 강을 9번을 넘기도 한다.(一夜九渡河己, 夜出古北口記 같은 글이 있음), 장마철 6월에 떠나 10월에 돌아 왔으니 압록강에서 북경2300리, 다시 열하까지 700리, 즉 왕복6000리를 돌아다닌 것이다. 전날 밤에 잠자리에 누웠더니 이역만리 여기까지 형님 따라 연경에 왔던 연암이 생각났던 것이다.
다시 만리장성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는 長城八達嶺으로 달렸다. 나는 버스 앞쪽에 앉아 앞에 펼쳐진 전경에 눈을 띄지 못햇다. 한참동안의 대평원을 달려가자 멀리서 감싼 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풍광을 보면서 (시의 분위기는 이런 여행을 노래한 것은 아니지만) 문득 이백의< 送友人> 靑山橫北郭 白水遶東城 此地一爲別 孤蓬萬里征....구절이 생각났다.
만리장성에 대한 소개는 간략히 하기로 한다. 만리장성은 보통 진나라 시황제가 축성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전에 춘주천국 시대에도 북방의 흉노족을 막기위해서 있었다고한다. 길이는 명나라 때 2700km....동쪽의 요양성에서 서쪽의 감숙성 까지.... (혹자는 정말 만리장성리 만리나 되는냐?하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란다).
아무튼 그 규모를 감상할 때면 그 산불기에 어떻게 성을 다 쌓았을까 하고 성을 쌓는데 동원된 민초들의 고생을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나라는 법가 사상에 기초를 두고 BC221년에 건국되었는데, 도량형 통일, 군현제 실시 등 개혁을 하고 아방궁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는 등 가혹한 정치도 하였으며, 법과 형벌을 엄하게 하면 오래오래 갈 줄 알았지만 통일후 겨우 15년 만에 망하고 만다.
다음은 사진을 보자
팔달령에서 케이블카를 탔다. 보통 장성이라고 한다. 팔달은 사방이 잘보여서 팔달이라나?(자신없는 가이드 말씀)
머니뭐니 해도 86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도 먼저 올라가신 황보 평 어른신이 대단하다.
그리고 나의 느낌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만리장성에 어휴~수 만명....
끝으로 오고가는 길에 버스에서 죽포 형님과 주고 받은 한시 두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당시를 분류할 때, 시대적으로는 초당,성당,중당,만당으로 분류하지만, 내용상으로는 山水詩, 邊塞詩, 社會詩....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시적 배경이 북경의 팔달령 만리장성은 아니고 서역지방이지만, 어쨌든 당나라 때 북방 전선에 싸우러 나간 남정네들의 애환을 담은 邊塞詩 두 수이다.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명시란 게시판에 상세히 놀려 놓겠음)
出塞 / 王之渙 (唐)
黃河遠上白雲間 황하는 멀리 흰 구름 사이로 흘러가고,
一片孤城萬仞山 외로운 성 하나 높은 산 위에 있네.
羌笛何須怨楊柳 오랑캐 피리는 어찌 원망스런 <절양류>를 불어대는가?
春風不度玉門關 봄바람은 옥문관을 넘지도 못하는데...
凉州詞 /王翰 (唐)
葡萄美酒夜光杯 맛좋은 포도주 야광 잔에 부어,
欲飮琵琶馬上催 마시려는데 말 위 비파 소리 출정을 재촉하네.
醉臥沙場君莫笑 취하여 사막에 누웠나니 그대 웃지 말게나.
古來征戰幾人回 예로부터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 이 몇이던고?
그리고 또 이 아래 또 한 수는 예전에 아내가 붓으로 써 보기도 햇던 구절....(그것도 세월이라고 그 구절을 아무리 생각해 내려 해도 거기서는 나지 않았다. 돌아와 찾아보니 아래와 같더라)
出塞(출새) 王昌龄(왕창령)
秦時明月漢時關, (진시명월한시관), 진나라 때 뜨던 달, 한나라 변방에 비추고
萬里長征人未還. (만리장정인미환). 만리 장정에 나간 사람 아직 돌아오지 못했네
但使龍城飛將在, (단사룡성비장재), 만약 용성에 飛將軍 李廣이 살아 있었다면
不敎胡馬渡陰山! (부교호마도음산)! 오랑캐 말들이 음산을 넘어올 수 없을 텐데
저녁을 먹고 여독을 풀려고 발맛사지를 갔는데.... 어느 큰 정문과 울타리에 체육관 같이 큰 업소였다.
그사람들 올림픽 선수들 맛사진 해준 팀이라나? 그런데 그걸 내세워 디게 비싸게 받더라.
시원하긴 한데... 쪼매 장사속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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