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는 북경에서 2박3일을 보내고 오후 늦게 제남으로 열차를 타고 이동했지요. <열차 부분은 별도 참조>
맹묘 답사기를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이 아래에 게시되는 사진 속에는 죽포선생님의 "맹자 성독" 동영상도 끼어 있으니깐,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잠깐 가이드 이야기를 한번 하고 갈까요?
제남에서 우리를 제일 먼저 반겨 준 사람은 26세 총각 "최○○"이였습니다. 그 친구 아직 가이드 경력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비교적 성실하고 순수했습니다. 처음 만난 버스에서 마이크를 잡고서 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고, 굉장히 긴장된다는 말까지 했으며, 태산 등정 후 점심먹고 쇼핑센터(보석)를 들릴 때는 가까히서 보니 진실로 미안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다른 가이드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거든요.
3일째 밤을 제남 황대호텔에서 자게 됩니다. 4일째 날이 밝아서 우리는 일찍 곡부로 향합니다.
제남과 곡부는 약 200km(?, 혹은 130km) 떨어져 있지요. (곡부-추성 30km). 버스안에서는 좌우 풍광을 보며 산동성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산동성은 한국의 1.5배, 인구는 9800만으로 하남성(1억3000) 다음으로 2위...
주변에 산이 없이 주로 평원이었는데, 논농사라기보다는 밭농사 였습니다. 한국에 수입되는 중국산 농산물이 대부분이 산동성에서 난다고 합니다. 대추가 매우 맛있다는 등.... 과거에는 제남 동부는제나라, 남부는 노나라....
여기서 잠시 맹자 이야기를 하고 가지요. 맹자는 (출생년도에 이설도 있지만) 대체로 공자(BC551년)보다 약 출생년도가 179년 늦습니다. 그러고 보면 맹자의 스승이 누구냐는 논란에 있어서 자사의 제자라기 보다는 재전제자가 맞겠네요.
또한 논란이 있는 맹자책에 대하여도 본인이 직접 맹자를 썼다, 아니다 제자들이 썼다는 등 논란이 있고요. 맹모삼천지교나 단기지교 등의 고사는 맹자책에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고 後漢 때 쓰여진 劉向의 烈女傳에 나온다고 합니다.
한편 청나라 때 고증학자들은 이를 두고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는 군요.
아무튼 맹자는 공자 처럼 어려서 일찍(3세?) 아버지를 여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고 봐야 되겠지요.
그리고 맹자의 사상은 크게 구분하면 왕도정치, 혁명론, 성선설 등 입니다. 특히 그의 혁명사상, 민본사상 때문에 명태조 주원장의 경우 금서로 지정할 정도로 한 때 위정자들은 맹자 읽는 것을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겼답니다.
8시에 출발한 우리들은 2시간반을 달려 10시30분 맹묘에 도착했습니다.
입구에서 마주치는 첫번째 문 영성문이랍니다(櫺 : 난간령) . 글자가 너무 어렵죠?
(잠시 베껴온 글로 보충하겠습니다). 가원 이윤숙선생의 글....
星은 원래 ‘靈星’을 말하는 것으로 하늘의 옥황상제와 그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는 태미원(太微垣)의 오른쪽 담장밖에 있는 별로, 靈臺(영대)라고도 한다.
문왕이 지었다는 영대는 바로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는 천문대이다. 공자가 학문으로는 하늘의 옥황상제에 해당하기에 그를 모신 사당의 밖에 영성문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옛날 漢나라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먼저 靈星에게 제를 지내면서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宋代에 들어와 하늘에 제를 지내는 예의를 공자에게도 그대로 적용하면서 영성문을 도입하되 풍년을 기원하는 것과는 무관하므로 글자를 ‘靈’에서 ‘櫺’으로 바꿔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櫺星門은 우리나라의 홍살문 곧 정려문(旌閭門)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 이후 중국에서는 패방(牌坊)으로 발전하여 표지방(標志坊), 공덕방(功德坊), 과거성취 등의 뜻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 ?星은 하늘의 文星으로 흔히 文曲星이라고도 한다. 북두칠성의 가운데 네 번째 자리별로 하늘의 저울추인 天權星이라고도 하는데 공자가 바로 이 문곡성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강감찬 장군도 이 별의 화신이라고 한다.(여기까지가 베껴온 글입니다)
맹묘는 한가로히 사람들도 적었고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전날 북경의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비교해서인지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숲도 적당히 우거져 있고....
가이드도 차분히설명을 하더군요..... 그런데저는 벌써 며칠 지났다고 다 잊어 버렸습니다.
이곳 나무들도 모두 수령이 오래된 것일 것입니다. 혹덩어리는 사람으로 치면 암 덩어리인데.... 이것을 만지면 장수한다고 해서 모두를 한번 씩 만지는 재미도 느껴보고....
그리고 다음 사진도 무슨 의미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생각이 나질 않군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여기서도 가원선생의 글로 보충하겠음)
<맹모단기처>, <子思子作中庸處> 비석
비공비림 비판 때 훼손되었던 흔적으로 기억된다.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좌우에 늘여뜨린 글씨.... 居仁由義... 繼往開來.... (다른 사진에 보면 기둥 주련에도 같은 구절로 써있다)
(참고 : 繼往聖 開來學 : 공자는 요순유탕문무주공 등의 성인처럼 王位에는 오르지 못햇지만, 그들 성인들의 뜻을 이었고, 후학들을 위해 학문의 길을 활짝 열어 놓은 사람이다 라고, 주자가 공자를 두고서 아주 단적으로 평한 구절이다.
맹자나 동몽선습에도 나오는 구절.... )
맹묘에는 사진은 못찍어 왔으나, 繼往聖門 도 있었고, 반대편에 開來學門도 있었다.
황제가 출입할 때만 여는 문이란다.
후한 말기에 趙歧가 맹자에 註를 달면서 비로소 7편(상하14편)이 완성됩니다.
맹자가 유세할 때 쓰이던 기구와 치장들이랍니다.
맹자 학교가 있었다.(서당이....)
우선 여기서 동영상을 하나 감상하시고요 . 거기 있는 맹자 학습관에서 죽포형님의 맹자 성독을 녹화하여 보았습니다. 매우 의미있는 동영상이라고 봅니다.
이어서 계속 사진을 감상하시지요
건륭황제인가 강희황제인가(?) 친필 해서로 기억합니다만 맞는지는 모르겟네요, 소석 형님께서 그때 건륭황제 어필이라고 한 것도 같은데....기억이 가물가물....(낙관을 크게 근접사진으로 찍어 올 것을...)
기념품 가게도 있었는데..주련 구절 때문에 한두장 찍어 보았습니다.
또 맹자 생가라고 꾸며 놓은 형상도 있었는데... 또 무슨 유래깊은 우물도 있었고.... 나중에 보완할께요. 또 이 옆에 이른바 孟府(맹자 마을)도 있었고요.... 오늘은 이만 생락하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맹묘 답사가 끝났네요. 그래도 오전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가을 한나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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