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유적

남경여행 관련 한시1(항우 관련)

경전선 2026. 4. 14. 13:07

2026. 4. 22~4.27, 중국 남경, 마안산, 양주를 여행할 예정인데, 그 지역과 관련한 한시를 정리해 본다.
이번 여행에서 항우가 자결한 오강정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 공부 삼아 적어 본다.

垓下歌  項羽

力拔山兮氣蓋世로다, 時不利兮騅不逝로다

騅不逝兮可奈何오, 虞兮虞兮奈若何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온 세상을 뒤덮도다. 때가 불리하니 騅馬도 가지 않는구나.

騅馬가 가지 않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虞美人이여, 虞美人이여, 어찌한단 말인가.

 

(이하 통감절요 해석을 베겨 옮)

... 이에 項王이 준마를 타니 휘하의 장사로서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백여 명이었다.

밤을 당하여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나가 도망하였는데, 平明(새벽)에야 漢나라 군대에서 비로소 이를 깨닫고 기병장 灌嬰으로 하여금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였다.

項王이 淮水를 건널 적에 기병으로서 소속된 자가 겨우 백여 명이었다.

陰陵에 이르러 혼미하여 길을 잃고 한 농부에게 물으니, 농부가 속여 말하기를 “왼쪽으로 가라.” 하였다.

왼쪽으로 갔다가 마침내 큰 늪 가운데에 빠지니, 漢나라 군사들이 이 때문에 추격하여 따라잡았다.

項王이 이에 다시 병력을 이끌고 東城에 이르니, 마침내 28명의 기병만 있었다.

項王이 스스로 탈출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그 기병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를 싸웠으나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마침내 곤궁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진실로 결사전을 하겠으니, 적장을 목 베고 적의 깃발을 베어 세 번 이겨서 諸君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게 하겠다.” 하고는 漢나라의 장수 한 명과 都尉 한 명을 목 베고 수십 명에서 백 명을 죽이니, 모든 기병이 모두 탄복하였다. 이에 項王이 동쪽으로 烏江을 건너려 하니, 烏江의 亭長이 배를 대고 기다리다가 項王에게 이르기를 “江東이 비록 작으나 땅의 넓이가 천 리입니다. 또한 충분히 왕 노릇 할 수 있으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급히 건너소서.” 하였다.

이에 項王이 웃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 어찌 이 강을 건너겠는가?

또 내가 江東의 子弟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이제 한 사람도 돌아가는 자가 없으니,

비록 江東의 父兄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 노릇 하게 한다 한들 내 무슨 면목으로 이들을 볼 것이며, 비록 저들이 말하지 않으나 내가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項羽가 마침내 기병들로 하여금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短兵을 잡고 접전하게 하였는데, 項籍이 홀로 죽인 漢軍이 수백 명이고 자신도 또한 수십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이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漢나라에서 내 머리에 千金과 萬戶의 고을을 현상하였다 하니,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풀겠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 《史記項羽本紀》에 나옴 -

 

夏日絶句  李淸照

生當作人傑  死亦爲鬼雄

至今思項羽  不肯過江東

살아서는 마땅히 인걸이 되었고, 죽어서도 귀신의 영웅이 되었다.

이제와 항우가 생각나는 것은, 강동으로 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북송 말에 이안거사(易安居士)라는 호로 알려진 李淸照라는 여류시인이 있었다. 그는 18세에 이청조는 조명성(趙明誠)과 결혼하였는데, 조명성은 금석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금슬 좋던 부부는 1127년 북송이 멸망하면서 남편은 병사하고, 개개 했다가 파혼하고 그의 말년은 매우 외롭고 떠돌이 비참한 삶을 살다 죽었다. 

그는 남송 조정이 중원을 회복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깨닫고 남송 조정의 무능함을 질책하고 사대부의 부패에 대해 비분하는 시를 썼다. 이런한 점을 감안하면 위의 시도 막연하게 그저 항우를 추모했다기 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마당히 하여야 할 일로 여겨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좋을 것 같다.

 

題烏江亭 杜牧

勝敗兵家不可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전쟁의 승패는 예측하기 힘든 것, 수치를 안고 참는 것도 남아로다강동에는 훌륭한 인재 많으니권토중래하였더라면 어찌되었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을…

 

만당의 두목은 위와 같이 감상적인 영사시를 지었지만, 북송 때 왕안석은 좀 달리 생각했다.역시 개혁가다운 왕안석의 시각이다.

 

烏江亭 王安石

百戰疲勞壯士哀  中原一敗勢難回

江東子弟今雖在  肯與君王捲土來

수없이 싸워 피로함에 장사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중원에서 크게 패하여 대세를 돌이키기 어렵게되었네.

강동의 자제들이 지금 남아 있다하더라도, 과연 군왕과 더불어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려 하였을까? 

참고로 항우가 숙부 항량과 함께 처음 병사를 일으킨 곳은 회계군(지금의 강소성 소흥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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